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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행님과 아그들

입력
2002.04.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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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좀 시들해진 것같지만 그래도 삼행시의 유행은 여전하다.젊은 사람들이 주로 지어내는 삼행시는 대화체로 재치를 뽐내는 형식인데, 말장난이 지나쳐 혐오스러운 것들이 있고 어법에 맞지 않는 내용도 많다.

그러나 말도 안되는 삼행시 속에 시대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모든 유행에는 이유와 배경이 있다. 그 유행의 속내를 알아야만 대중의 정서를 옳게 파악할 수 있다.

삼행시 중에는 행님과 아그들이 후렴처럼 들어 있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만:만두 가져왔습니다, 행님. 우:우이씨, 왜 단무지가 없냐? 아그들아. 절:절이고 있습니다, 행님.

또 하나 예를 들면, 묵:묵으로 한 대 맞고 싶습니까 행님? 찌:찍(찌)소리 내지 말고 가만히 있거라 아그야. 빠:빠~악(행님이 맞는 소리).

그 다음 날 쫄따구는 볼 수가 없었다. 이 정권 들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해서 그런지 삼행시에는 호남사투리가 애용된다.

영남정권 시절에 영남사투리인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유행했던 것처럼.

그런데 행님은 어떤 사람이고 아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행님은 무조건적인 존경과 복종의 대상이며 아그들은 행님이 보살피고 거두어 주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행님이 충성스럽게 추종해야 할 두목이라면 아그들은 삼행시에 나온대로 쫄따구들이며 하수인들이다.

조폭영화 ‘친구’의 “내가 니 시다바리가?”라는 대사처럼 시다바리인 것이다. 행님과 아그들이라는 호칭은 본질적으로 의리로 맺어진 조직의 언어다.

우리나라처럼 지연과 학연이 없으면 출세하기 어려운 곳에서는 누구하고라도 행님과 아그들의 관계를 맺는 것이 중요하다.

정으로 맺어진 관계, 내가 잘 아는 사람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유능하고 힘있는 행님과 충직하고 의리있는 아그들은 한 덩어리로 ‘우리’가 되어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준다.

배신은 곧 파멸이다. 행님은 사랑스러운 아그들에게 일과 자리를 챙겨주어야 하는데 그 과정이 정만으로는 안되니 돈도 오가게 되는 것이다.

행님-아그들의 관계가 공고해질수록 우리가 아닌 사람들은 남이거나 적이 된다. 그들의 일체성과 단결은 배타적 독점의식으로 발전한다.

그런 행님과 아그들이 사회를 주도하는 세력이 됐을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대통령의 아들이 형처럼 친하게 지낸 기업인으로부터 대가성이 없다지만 거액의 돈을 받고, 검찰 고위간부가 ‘형님’에게 수사기밀을 알려주고, 일정한 직업도 없는 사람이 권력실세와 형제처럼 잘 안다고 위세를 부리는 행태는 ‘우리’가 아닌 남들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님과 아그들에게는 공공의식이 박약하다. 자신들이 다루는 업무, 자신들이 내린 결정이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고려와 분별에 어둡다.

그리고 행님과 아그들은 의식과 성향이 비슷한 또 다른 행님-아그들과 얽히고 설켜 “우리가 남이가?”를 소리높여 외치게 된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이런 행태는 계속되고 있으며 오히려 더 심해졌다. 행님-아그들의 논리와 정서는 이미 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 있다.

삼행시에는 그런 사람들에 대한 모방과 선망도 나타나지만 근본적으로 질시와 비난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점 중 하나는 아직도 공직자들이 공과 사를 구별할 줄 모른다는 점이다.

정치지도자든 기업의 우두머리든 교육기관의 장이든 자신의 직위와 권한을 사용(私用)하는 일이 너무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잘못인지도 잘 모르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우리’는 ‘나’의 확대판에 불과하다. 행님-아그들의 관계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잘못을 확대 재생산해내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

임철순 논설위원

yc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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