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혁구도가 대선 정국의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대선후보 경선과정에 진입한 민주당과 한나라당 내부에서 진보-보수 노선 논쟁 또는 색깔시비가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여야간에도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의 ‘좌파정권’ 발언을 계기로 색깔 공방이 불 붙고 있다.우리사회의 이념과 계층 스펙트럼을 토대로 하는 보혁공방이 이번 대선국면에서 증폭된 것은 ‘노무현 돌풍’ 때문이다. ≫
민주당 전국 순회 국민경선을 거치면서 진보성향의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바람을 일으키자 당내 라이벌인 이인제(李仁濟) 후보는 기세를 꺾기 위해 노 후보의 사상 및 색깔 문제를 주요 무기 삼아 맹공을 펴고 있다.
한나라당은 노 후보의 지지도가 수직 상승, 한나라당의 유력 후보인 이회창 전 총재를 크게 앞지르자 노 후보에 대한 이념 및 노선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노무현 바람은 역대 대통령 선거의 가장 큰 변수였던 영호남 대립구도를 와해시키는 효과를 낳고 있다. 영남출신인 노 후보는 호남에서 80~90%의 지지도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외 지역에서는 40~60% 대의 고른 지지를 얻고 있다. 노 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될 경우 지역주의가 12월 대선에서 중요 변수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보수주의를 표방하는 한나라당이 택할 수 있는 최대 전략은 보혁대결로 대선구도를 몰고 가는 것이다. 이회창(李會昌) 최병렬(崔秉烈) 후보등 한나라당의 주요 대선주자들은 이미 보수대연합론의 깃발로 보수세력 결집에 나섰다. 최 후보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가 10일 회동을 가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의 후보로 확정되면 공언했던 대로 진보성향의 정치세력을 흡입해 들이면서 정계개편을 추진할 개연성이 높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최병렬 의원 등이 중심이 돼 보수 정체성을 보다 분명히 하는 정계개편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여야 대선후보 경선과 6월의 지방선거가 끝난 뒤 여야 공히 진보 또는 보수 정체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대적인 정계개편이 이뤄질 가능성이 있다.
이제 관심은 보혁대결 구도에서 어느쪽이 유리한가에 모아지고 있다. 정가에서는 보혁 대결구도가 본격 형성될 경우 급진적이고 불안정한 이미지가 있는 노 후보 바람의 거품이 상당부분 걷힐 것으로 전망하는 견해가 적지않다.
역대 주요 선거에서 안정희구 심리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분단체제 하에서 아직은 색깔론이나 레드 콤플렉스가 위력을 갖고 있다는 근거에서다. DJ정권의 각종 개혁 추진과정에서 나타난 국민의 개혁 피로증도 보수노선의 후보에게 유리한 요인이다.
그러나 구태정치에 강한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 참신한 이미지의 정치인을 갈구하고 있고 이것이 노무현 돌풍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혁대결구도가 노 후보에게 불리하지 않다는 견해도 적지않다.
실제로 민주당 경선과정에서 이인제 후보가 노 후보의 장인 좌익활동 경력, 재벌 해체 발언 등 급진적 면모 등을 집중 부각시켰지만 투표결과에는 별다른 영향을 못 미쳤다. 8,9일에 실시된 문화일보와 YTN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격심한 색깔 노선 공방 속에서도 노 후보의 지지도 상승세는 꺾이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진보, 중도, 보수 성향 후보 중 진보후보를 택하겠다는 응답은 70%를 넘었다. 노 후보 지지층에 대학교수 등 전문직 종사자와 고학력층이 많아 색깔론이나 이념공세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만 여야의 후보가 확정되고 보수-진보간의 이합집산이 이뤄진 뒤 TV토론 등을 통해 본격적인 후보검증이 시작되면 보혁구도가 어떤 판세로 전개될지 예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이계성기자
wkslee@hk.co.kr
■민주당
민주당 내부의 진보ㆍ보수 공방은 기본적으로 이인제 후보가 노무현 후보의 사상 검증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후보가 노 후보를 “급진 좌파”라고 공격하는 데 대해 노 후보는 “개혁적 중도일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는 게 요점이다.
일반 의원들은 주로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색깔론적인 이념 공방은 옳지 않다”는 원론적인 입장만 밝히고 있다. 다만, 공개적으로 노 후보 지지를 선언한 김원기(金元基) 추미애(秋美愛) 의원 등 개혁 성향의 중진ㆍ소장파 의원들이 이 후보측의 사상 공세를 비판하며 노 후보의 좌파성을 부정한다.
이 후보가 노 후보를 좌파로 규정하며 주장하는 근거는 크게 네 가지이다. 우선 노 후보의 대한민국 건국 역사관으로 노 후보가 작년 11월8일 안동시민학교 특강에서 남북한을 등가시(等價視)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수정주의 사관’을 드러냈다는 게 이 후보측 주장이다.
또 노 후보가 1990년 재야 인사 들의 주한미군 철수 요구 성명서에 서명한 점, 최근 주간지 기고에서 “통일이후에 대한 소모적인 체제 논쟁은 그만 둬야 한다”고 쓴 사실, 80년대 초선 의원 시절 재벌을 강하게 비판한 점 등도 이 후보측은 중요하게 여긴다.
노 후보측은 과거 발언 사실 등은 인정하면서도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하며 생각은 바뀔 수 있다”고 반박한다. 주한미군 철수 주장 등에 대해서도 “당시에는 공감했었지만 정당 생활을 하면서 공당의 의견으로는 적절치 않다는 입장을 갖게 됐다”고 해명한다.
노 후보는 특히 재벌과 각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 “나는 기업에 적대적이지 않으며 민주당의 정강 정책인 중도개혁 노선에 충실할 뿐”이라고 말한다.
신효섭기자
hsshin@hk.co.kr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분위기가 무르익으면서 한나라당에도 제한적 보혁대결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이회창 최병렬 후보가 각각 국민대통합, 보수대연합을 주장하고 반대쪽에서 이부영(李富榮) 후보가 개혁후보론을 내세우는 모습은 잠재했던 당내의 이념ㆍ노선 차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 전체가 보수쪽으로 기울어 있어 본격적인 보혁대결과 이에 따른 경선 후유증은 점치기 어렵다. 현재의 보혁대결이 기본적으로 노풍 대응 방안을 놓고 이뤄진 데다 개혁 후보의 경선 승리 가능성을 점치기 어렵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의 보혁대결은 오히려 보수 후보의 본선 경쟁력을 높일 수도 있다.
따라서 당내의 시선은 보혁대결보다 두 보수 후보의 대표성 다툼과 그 과정에서 나타난 대외 연대ㆍ제휴 움직임에 모아지고 있다. 대외 연대 움직임은 최 후보가 5일 경선 출마회견에서 ‘권력구조 개편을 포함한 개헌’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면서 시작됐다.
이는 자민련과의 연대에서 내각제 개헌이 핵심 고리라는 점에서 주목됐다. 일단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와의 연대가 가능해지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과 박근혜(朴槿惠) 의원을 포함한 포괄적 연대를 시야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의 포괄적 연대는 설사 정계 개편에까지 이르지 못하더라도 강한 집표력을 가질 수 있다.
이회창 후보로서는 최 후보의 행보를 견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만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하고 개헌 관련 당론을 번복해야 하는 등의 부담이 있어 이회창 후보의 적극적인 참여는 제약되고 있다. 보수색을 강하게 드러낼 경우의 득실 계산도 아직 끝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황영식기자
yshwang@hk.co.kr
■보.혁공방 말말말
▽노무현
“개혁은 급진적이고 과격해선 안 된다. 나는 기업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지 않다.”(3월29일 KBS 라디오 프로그램 대담) “인간의 따뜻한 피가 흐르는 시장경제체제로 가자고 주장한다. 골고루 잘 살아야한다. 여기다 대고 빨간 칠을 하기 때문에 빨갛다고 할까봐 말도 못한다.”(9일 충북지역 당원간담회)
▽이인제
“당의 중심인 중도개혁 노선의 승리를 위해 최후까지 싸워 승리할 것이다.”(9일 기자간담회) “한 인간의 사상과 이념은 뼈 속에 스며들고 피로 흐른다.”(3월31일 전북 경선 유세) “우리 당 강령은 중도개혁인데 노 후보는 급진 좌쪽임이 분명하다.”(3월28일 전북 TV 토론)
▽이회창
“급진세력이 좌파적인 정권을 연장하려 하고 있다. 잘못된 역사인식과 감각으로 너무 급진적으로 나라의 기본 틀과 구조를 깰 수 있는 방향으로 가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3일 경선 출마선언)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국가의 미래에 공감하는 세력은 모두 손을 잡고 함께 가는 국민대통합이 필요하다.”(4일 기자간담회)
▽최병렬
“진보세력은 고도로 조직화되고 운동역량을 비축한 반면 이 나라를 만든 보수세력은 흩어져 있다. 국민의 70%를 차지하는 이들을 한 데 묶는 보수대연합을 만들어야 한다. 보수의 목타는 갈망을 내가 채우겠다.”(5일 경선 출마선언)
▽이부영
“지금은 보수와 진보를 넘어서는 ‘제3의 길’이 호응을 얻고 있다. 갈등과 대립의 정치보다는 세대간, 계층간의 국민 통합의 정치가 필요하다. 색깔론은 구시대적 좌우이념의 색깔논쟁에 불과하다.”(2일 경선 출마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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