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손쉽게 국민을 동원하고 유권자의 관심을 끌 수 있었던 정치시대는 지나갔다.
미니 주말 연속극으로 비유되었던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 흥행이 어쩐지 주춤해진 것 같다.
주인공들이 쏟아내는 대사도 별로 시청자들의 흥미를 끌지 못하고 있다.
지난 주말 3연전에서 노무현 후보가 모두 승리를 거두어 역전 드라마를 연출했지만, 투표율은 50%를 약간 웃도는 수준에 머물었다.
아직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흥행이 반감된 이유는 거친 이념공세 때문이 아닐까.
정치 이데올로기가 후보를 결정하는 중요한 잣대 중의 하나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념은 정책의 기반이며 국정을 이끌어 가는 철학의 일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이념논쟁은 진부한 색깔론으로 변질된다.
이러한 색깔론과 이념공세의 이면에는 우리 사회 구성원을 이분화하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으며, 종종 흑백논리를 동반한다.
30여년의 군사통치로 인한 흑백논리적 사고방식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을 적과 동지로 나누었으며, 타협보다는 투쟁, 대화보다는 강경대응에 익숙해지도록 했다.
선거전략의 차원에서 사회현상과 그 주체인 사회 구성원을 단순화하는 작업은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화 전략은 종종 사회현상의 다른 중요한 측면이나 특성을 사장시켜 본질을 왜곡시킨다.
우리 사회는 신분을 기초로 하는 농경사회도 아니고, 굴뚝산업이 주축이 되었던 계급적 산업사회도 아니다.
하나의 잣대로 줄 세우기에는 이미 우리 국민이 너무나 역동적이며 다원적이다.
8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는 그 동안 내면화 해 온 다원적 이익을 서서히 그러나 꾸준히 여러 사회집단을 통해 분출해 왔다.
인터넷 공간에 들어서면 사회집단과 단체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각종 단체와 모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그들만의 가치를 키워가고 있다.
노동과 자본의 이익을 넘어선 여성, 소비자의 권리, 환경과 생태계에 대한 관심과 가치 부여를 투박한 이념적 잣대로 재단하기는 어렵다.
쉽게 정치하던 시절은 지나갔다.
지역의 잣대로 유권자를 나누어 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쉬운 정치는 이미 기가 꺾였다.
좌파와 우파로 나누거나 노동자와 자본가로 나누어 그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갈등을 전제로 정치를 펼치려는 것도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노조원 모두가 한 목소리로 외치기 어렵고, 마찬가지로 대기업들도 모두 한 배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정책노선이 충돌하고, 전경련과 경총의 대선 전략이 다른 것이 현실이다.
색깔론은 분화해야 한다.
사회가 다원화하고 구성원의 이해가 분화하듯이 색깔론은 정교한 정책 차별성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촌스런 원색대결이 아니라 중간색 파스텔 톤의 입지를 생각하는, 우아한 정책대결이 필요하다.
동시에 새로운 잣대가 절실하다.
우리 사회를 단선적 또는 평면적 차원을 넘어선 3차원, 4차원의 공간으로 승격시키기 위해서는 투명성의 잣대가 ‘중심 축’이 되어야 한다.
투명성의 잣대로만 새로운 시·공간을 넘나드는 민심을 꿰뚫을 수 있다.
좌파 우파의 이념논쟁보다는 어느 정치지도자와 정당이 가장 투명성을 담보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시급한 것인 아닌가.
계속 불거지는 각종 게이트와 정치권의 연루 상황을 지켜보면서 국민은 거친 이념공세의 효용성에 공감하지 못한다.
스스로 고해성사를 하면서 투명성의 잣대를 내세웠던 김근태 의원이 중도 하차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가 남긴 작은 불씨는 우리 정치를 새롭게 할 수 있는 소중한 자신이다.
점차 어려워지는 정치현실이지만 투명성의 잣대를 내세운다면 의외로 쉽게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그 불씨를 지필 용기만 있다면.
이정희 한국외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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