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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이-팔 소녀 비극'커버스토리 / 누가 이들을 죽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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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위크 '이-팔 소녀 비극'커버스토리 / 누가 이들을 죽음으로…

입력
2002.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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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주간인 3월 29일 오후 예루살렘 남서부 중심가의 한 상점. 긴 머리의 이스라엘 여고생 레이첼 레비(17)가 붉은 후추와 허브를 고르고 있었다. 레비가 가족과의 만찬을 생각하며 흥얼거릴 때 상점 바로 앞에 선 버스에서 팔레스타인 여고생 아야트 아크라스(18)가 내렸다.엷은 갈색 눈의 아크라스는 상점 앞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 두 명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속삭였다. 아크라스는 그를 수상히 여겨 막아서는 경비원을 뿌리치고 상점으로 돌진했다.

후추와 허브의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레비와 어깨가 부딪힌 순간 그는 주저 없이 옷 속에 두른 폭발물 버튼을 눌렀다.

엄청난 폭발이 발생해 두 소녀는 서로 반대 쪽으로 튕겨져 나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경비원을 포함, 다른 이스라엘인 4명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이날 세계 언론들은 일제히 ‘결혼 앞둔 18세 여고생 자살폭탄 테러’라는 제목의 기사를 주요 뉴스로 전했다.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 최신호(15일자)는 지난달 세계를 놀라게 한 여고생 자살폭탄테러범 아야트 아크라스와 그의 희생자인 레이첼 레비의 비극을 커버스토리로 소개했다.이스라엘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며 성장한 아크라스와 우연히 테러의 희생자가 된 레비.생전에 일면식도 없었던 두 평범한 여고생의 죽음은 이-팔 분쟁의 비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서로다른 성장 환경

베들레헴 인근의 데하이셰 팔레스타인 정착촌에서 태어난 아크라스는 이스라엘인 밑에서 건설업을 하는 아버지 덕분에 11명의 형제들과 함께 유복하게 자라났다.

그가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심을 품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첫번째 인티파다(무장봉기) 때부터. 큰 오빠인 사미르가 마을을 침략한 이스라엘군에 돌을 던졌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투옥된 후 이스라엘의 만행을 세계에 전하는 기자가 되는 꿈을 키워 나갔다.

갓난아기 때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민을 갔다가 부모의 이혼으로 8년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 온 레비는 홀어머니 밑에서 우울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기도 했지만 할리우드 영화, 쇼핑, 다이어트 등에 열광하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는 TV에서 자살폭탄테러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내가 피해자가 될 리 없잖아”라며 채널을 돌리곤 했다.

■순교자와 희생자

이스라엘군에 의한 형제, 친척들의 셀 수 없는 사망과 부상을 목격해 온 아크라스가 ‘순교’를 결심한 것은 지난달 초. 마을에 진입한 친한 친구가 이스라엘군의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후였다. 불과 몇 달만 해도 자살폭탄테러는 남성들의 성역이었지만 아크라스에게 손쉽게 기회가 찾아 왔다.

테러 요원과 테러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자살테러 작전으로 선회한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 알 아크사 순교자 여단이 여성 테러 요원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크라스는 가족과 약혼자에게조차 알리지 않은 채 한 달 가까이 고된 테러 훈련을 받았다. ‘거사’ 수일 전에는 그의 사망 직후 팔레스타인의 투쟁 의지를 북돋기 위해 방송국에 전달될 비디오 테이프까지 찍었다.

29일 아침 “오늘 내 시험에 행운을 빌어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보충수업을 위해 집을 나선 것이 가족이 기억하는 아크라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늘은 내가 멋진 생선 요리를 준비할게”는 불과 한 시간 후 아크라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될 레비가 상점을 향하며 같은 날 오후 어머니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끝없는 전쟁

두 소녀의 죽음 이후 두 가족은 슬픔과 서로에 대한 증오에 휩싸여 있다. 무고한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폭력과 강경 정책에 회의를 느끼던 레비의 가족은 이제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됐다. 레비의 아버지 아비가일은 “그들(팔레스타인인)도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분노를 표시했다.

아크라스의 가족은 “내 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결국 이스라엘”이라며 “우리가 비록 살인자의 가족이 됐지만 용감한 아크라스가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29일의 테러 후 알 아크샤 대원, 베들레헴 시장 등이 방문해 유족들을 위로하고 아크라스를 ‘영웅’으로 추켜세웠다. 아크라스 가족은 알 아크사와 세계 각지의 팔레스타인 조직들로부터 2만 5,000달러(한화 3,300여 만원)의 ‘보상금’도 받을 예정이다.

“아크라스를 본받아 더 많은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자살폭탄테러에 나서야 합니다. 그것이 아크라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는 길이니까요”라는 아크라스의 아버지의 말은 피의 악순환이 그치지 않을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준다고 뉴스위크는 전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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