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에서는 20세기 후반부터 둑을 단계적으로 허물고 있다. 땅이 좁고 지면이 해수면보다 낮은 곳이 많아 간척으로 땅을 넓히고 둑으로 바닷물의 침범을 막던 나라로서는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간척과 둑 쌓기로 없앤 습지와 개펄이 사람들의 삶에 주는 종합적 혜택이 간척지와 둑의 경제적 효과보다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도 최근 수 십 년 사이에 댐 없애기가 가장 중요한 시민운동 테마로 자리매김했다. 실제 미국 전역에서 수 백 개의 댐이 해체됐거나 허물어질 예정이다.
댐에 물을 가두어 각종 쓰임새에 대비하고 전력을 확보하는 것보다 자연스러운 물 흐름이 전제되는 강과 내의 생태계 유지ㆍ보존이 생활을 보다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울산은 2002 월드컵 경기를 유치한 뒤 국내에서 가장 먼저 경기장을 짓고 개장했다. 또 월드컵을 앞둔 최근 수 년 사이 도로포장 등 도시미관 정비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울산은 문화인프라가 극히 빈약한 곳이다. 경기장 외에 관광객이 거쳐가거나 머무르면서 ‘한국, 그 안의 울산’을 경험하고 마음에 담을 만한 곳이 별로 없다.
규모로는 30여 년 만에 인구 100만을 넘는 급성장을 했지만 그 과정에서 문화인프라 구축을 위한 연구와 투자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이다.
울산시가 선사시대 유적인 반구대(盤龜臺) 암각화(岩刻畵ㆍ국보 285호) 주변 개발을 추진하다가 시민단체와 학계의 반발에 부딪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문화 인프라가 무엇이며,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거나 대략 알면서도 ‘대충’ ‘빠르게’로 살아온 오랜 사회적 습관 탓에 일어난 일인지도 모른다.
진입도로를 닦고, 주차장을 만들고, 유적 가까이에 번듯한 전시관을 짓는 것으로 문화인프라 구축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박물관 미술관 전시관 등 역사와 전통문화를 배우고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는 시설과 프로그램은 문화인프라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문화유산과 관련된 시설과 프로그램의 규모, 운영방식, 활용도는 그 사회의 문화인식 수준을 나타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루 아침에 문화인프라 구축이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형 만한 아우가 없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좋은 스승 밑에서 더 나은 제자가 나온다는 말도 있다.
앞선 이들의 경험과 판단을 눈여겨보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 이에게는 뒤의 말이, 앞선 이가 잘못한 것까지 따라 하는 이에게는 앞의 말이 적절할 것이다.
문화인프라 구축에는 장기간의 연구와 투자가 필요하다. 비록 눈앞의 ‘월드컵 특수’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다고 해도 앞선 이들이 했던 것처럼 둑과 댐을 쌓았다가 허물고 강과 개펄을 목 조르다가 그만두는 일만은 따라 하지 않아야 한다.
전호태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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