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자 원고지에 기사를 쓰던 시절 3년 동안 쓴 원고를 모아본 일이 있다. 해외 근무 시절이어서 팩시밀리로 보낸 원고가 자연히 책상 위에 쌓였다.그렇게 3년 동안 모인 원고더미의 높이는 50㎝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건씩 썼고, 더러 다른 매체에도 썼는데, 일의 외형이 요것 밖에 안되나 싶었다.
작가 조정래씨가 쓴 소설 ‘태백산맥’ 원고더미가 작가의 키보다 훨씬 큰 것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탈고 후 한복을 입고 서서 원고더미와 키를 재는 사진이었다.
■ ‘아리랑’ 원고가 또 그만큼 될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끝낸 ‘한강’의 원고를 더하면 키의 몇 배나 될까.
근세 100년간의 민족사를 3편의 대하소설에 담은 집필생활 20년을 그는 ‘글 감옥’이란 말로 표현했다.
작품 구상과 취재, 그리고 4만 5,000장의 원고를 쓰는 동안 겪은 육체적ㆍ정신적 고통이 감옥생활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한강’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읽은 후기 ‘한강을 마치며’가 작품 자체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글 감옥 고백이 너무 절실하기 때문이다.
■ 매일 30여장씩 글 쓰는 작업을 그는 중노동이라고 말했다. 근로자들에게 직업병이 있듯, 그도 여러 가지 병을 앓았다.
누적된 과로로 인한 기침병으로 누울 수가 없어 2개월동안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을 잤다.
신경 과소비가 원인인 위궤양은 15년간 그를 괴롭힌 지병이었고, 너무 오래 앉아 글을 쓰느라 둔부에 종기가 생겨 앉지 못하는 고생도 했다.
탈장은 10권 출간 후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오래 앓아 누웠던 극심한 몸살과 오른 팔 마비도 육신을 너무 학대한 대가였다.
■ 그런 육체적 고통도 정신적인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 하니,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우익단체와 특정 정치인 유가족의 고발로 경찰과 검찰에 오래 불려 다닌 것은 너무 유명한 사건이 아닌가.
그러고도 그는 또 글 감옥에 갈 각오인 것 같다.
대하소설 3편을 쓴 20년을 자신의 중반기 문학이라고 말하는 그는 벌써 후반기 문학을 구상하고 있다.
환갑 나이에 문학청년 시대의 열정을 입에 담으며 “앞으로 한 열 권쯤 써 볼 생각”이라니, 대체 그 의욕의 발원지는 어딘가. 글 감옥이 아니라 글 낙원인가.
문창재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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