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의 이름은 주인의 이름으로 불린다.예컨대 맥코들 경의 하인은 미스터 맥코들, 트렌담 백작부인의 하녀는 미스 트렌담으로 불린다.
주인은 하인의 이름에 자신을 대입시켜 그들이 자신에게 예속된 존재라는 사실을 기뻐하지만, 동시에 그 고귀한 이름이 하인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는 귀족의 엄격한 규율과 엄격할수록 썩어 들어가다 못해 곪아 터지는 그들의 저열한 내면을 들춰낸다.
영상언어로 철학을 풀어내온 로버트 알트먼 감독의 신작 ‘고스포드 파크(Gosford Park)’는 1932년 영국이 배경이다.
윌리엄 맥코들 경(마이클 갬본)과 부인 실비아는 사냥 파티를 위해 친척과 친구를 저택 고스포드 파크로 불러들인다.
트렌담 백작부인(매기 스미스)은 허우대는 멀쩡하지만 맥코들 경에게 생활비를 받아쓰는 몰락한 귀족.
때문에 경력이 없는 풋내기 하녀 메리(켈리 맥도널드)와 이 저택을 찾았다.
영화는 메리의 시선을 중심으로 귀족끼리, 하인끼리, 그리고 귀족과 하인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충돌과 살인 사건을 고답적 추리 드라마의 기법을 이용해 풀어간다.
밀실 안의 누군가가 범인이며, 단서가 없다는 점, 누구나 혐의가 있지만 그 누구도 딱 들어맞는 범인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가사 크리스티의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을 닮았다.
저녁 식사를 마친 맥코들 경이 칼에 찔린 채 발견되고 경찰은 집안의 가족과 손님 모두를 용의자로 지목한다.
그러나 경은 칼에 찔리기 전 이미 독살을 당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대체 그는 왜 두 번씩이나 살해를 당했을까. 구두를 닦기 위해 , 은제품을 닦기 위해 집안 곳곳에 둔 독극물만큼이나 그가 살해될 이유는 많다.
그러나 감독의 마음은 범인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영 딴 곳에 가 있다.
성관계를 폭로하겠다며 처제에게 사업 자금을 뜯어내려는 형부, 그들의 아버지이자 장인인 맥코들 경은 처제와 은밀한 육체적 관계를 맺으려 하고, 귀부인은 남의 옷매무새를 흠잡는 데만 정신이 쏠려 있다.
귀족이라 명명된 이들의 속내를 드러내 보임으로써 감독은 유럽의 귀족이 스스로 도태의 조건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파티의 어울리지 않는 손님인 미국 배우와 그의 하인(실은 영화의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 하인으로 가장한 배우)을 통해 그들의 ‘전통’이 할리우드에서 ‘복제’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공장 직공을 농락하고 사생아를 낳게 하고, 그리고 그들을 하인으로 부리는 맥코들 경의 독살이 어쩌면 필연이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미국에서 쓰인 이 영화의 광고 문안이 가장 잘 말해 준다.
‘4시에 차, 6시에 만찬, 그리고 자정에 살인’. 속물적 귀족의 삶에 살인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귀족의 식탁을 만드는 하인들은 침을 묻혀 포크를 닦는다. 결국 귀족이란 하인의 경멸을 먹고 사는 어리숙한 존재.
‘숏 컷’에서 화려한 패션쇼를 매개로 사람간의 권력 문제를 파헤쳤던 감독이 영국식 저택을 배경으로 만든 추리극은 평론가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6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각본상을 수상하는 데 그쳤지만, 골든 글로브와 AFI(미 영화연구소)에서 주는 감독상을 수상했다. 12일 개봉.
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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