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정권 말기 국회는 정부의 거수기(擧手機)이고 KBS는 정부의 앵무새 노릇만 하는 거구기(擧口機)라는 지탄을 받았다.집권 자유당이 온갖 부정을 자행한 1960년 3월15일 대통령 선거 때도 편파방송만 하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결국 자유당의 3ㆍ15 부정선거가 도화선이 되어 학생들과 시민단체, 대학 교수들은 독재정권에 항거하며 4ㆍ19혁명을 일으켰다.
그때 서울신문사는 불타고 일부 학생시위대가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 국회의장(자유당 부통령후보) 집을 습격했다.
남산에 있던 KBS 방송국에도 시위대가 몰려와 방송국장과 아나운서 몇 사람은 방송국 뒤 박물관장 집으로 피신하기도 했다.
필자를 포함한 KBS 아나운서들은 방송이 정부의 대변인으로 변질돼 모든 비난의 표적이 되는 현실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 해 4월 26일로 기억된다. 충무로에 있던 동해루라는 중국집에 중견 아나운서들이 모였다.
장기범, 강익수, 강찬선, 임택근, 최계환, 전영우…. 우리는 장시간 논의 끝에 아나운서 28명의 이름으로 방송중립화를 결의ㆍ선언하기로 했다.
내용은 ‘방송은 사회의 공기이므로 불편부당하고 공정성을 유지해야 하고, 앞으로는 일체의 편파적 방송을 거부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선언문을 각 신문사에 보냈고 필자를 포함한 대표들은 당시 최치환 공보실장에게 직접 전달했다.
또 국영방송국의 공무원이었던 아나운서 신분에 대한 시정도 요구했다.
그러나 최 공보실장과 방송관리국장은 우리를 회유했다.
당장 방송의 중립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무원 신분에도 어긋나는 행동이니 선언문은 안 받은 것으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이 사건은 한국방송사상 최초의 언론자유·중립화 선언이었으나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워낙 빠르게 변화해 크게 주목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대단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아나운서들이 선도한 것은 방송사상 길이 남을 일이었다.
방송이 아직도 정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볼 때마다 그 사건이 생각나고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 황우겸ㆍKBS 초대 아나운서 실장·우신무역상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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