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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이 시대의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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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이 시대의 권위

입력
2002.03.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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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권위 있는 것이 거의 사라져 버렸다.권위는 신성(神聖)이 사라진 시대를 규율해 온 지상의 대체물 정도로 볼 수 있겠는데, 그 권위마저 사라져 가는 세상은 매우 삭막하다.

사실 오래지 않은 지난날만 해도 우리들 사이에는 약간의 권위가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대통령 각하께서 입장하고 계십니다” 하는 장내 아나운스먼트와 함께 기립박수 속에 들어오던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은 나름대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그런 행사장에서의 대통령도 별로 권위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

물론 권위가 그런 정치적인 분야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낙동강 가는 길목에 신순남 조산소가 있었다. 하얀 목책 울타리와 잘 가꾸어진 꽃밭이 운치 있는 집이었다.

그 조산소의 신순남 여사는 외지에서 태어난 큰 형만 빼고 우리 4남매를 모조리 받아낸 분이었다.

어머니와 길을 가다가 그 뚱뚱한, 양장에 금테 안경을 멋지게 쓴 이 할머니를 만나면 우리는 어김없이 어머니에게 목덜미를 잡혀 그 분에게 꾸벅 절을 해야 했다.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조산소 반경 500㎙ 안에 있는 집들은 다들 그랬다.

심지어는 서른이 넘은 노총각을 세워놓고도 “아니 이 녀석이 이렇게 컸어?” 하며 호탕하게 웃으시던 그 분은 그 지역에서는 대단히 권위 있는 분이었다.

요즈음 태어나는 아이들도 누군가의 손에 거꾸로 잡혀 볼기짝은 맞겠지만, 그런 관계가 더 이상 그분과 같은 권위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 병원 복도에서 하얀 가운 부대를 거느리고 회진을 도는 전문의를 매우 권위 있게 느낀 적이 있었다.

그의 표정과 말은 환자들의 애처로운 기대를 보듬고 어루만지는 은총과 권위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어머니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다는 조건에 크게 기인한 것이었다. 그 조건의 바깥에서 보면 그 권위도 결정적으로 무너져 가고 있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보고 있으면 의사들 자신이 그런 변화를 자조적으로 표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런 변화를 기꺼이 선구(先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교사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 되었고 이제는 교수들도 예전과 같은 권위를 누리기 어렵게 되었다.

부모의 권위도 마찬가지다. 우선 내 아이 앞에서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 부모의 권위를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운 것이 사실이다.

내가 못나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반드시 사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권위가 사라지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물론 있다. 세상이 평등해져서 모든 사물들에게 제 가끔의 타고난 몫이 돌아가게 되면 더 이상 권위가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완전한 세상은 완전한 인간처럼 단지 상정할 수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권위가 사라져 간다고 해서 그것이 이 세상이 완전해져 가는 징조일 수는 없다.

오히려 나는 권위가 사라져가는 이 추세가 매우 저열한 가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맹렬한 하향평준화의 한 양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가만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그 소용돌이가 느껴진다.

이 문명은 스스로에게 “이제 더 이상 권위 있는 것은 존재할 수 없어. 우리는 다 같이 추악해져야 해. 그것만이 우리의 추악을 가리는 길이니까” 하고 속삭이고 있는 듯하다.

모든 권위의 바짓가랑이가 잡아당겨지고 있는 이 불길한 현상은 또 어떤 역사의 필연에 의한 것일까.

휴일 아침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앉아 세상일을 생각하고 있으면 내 몸이 이 집, 이 땅덩어리와 함께 소리도 없이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아 가는 느낌이 든다.

이수태·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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