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ㆍ11 테러이후 모든 나라가 외교안보 위기에 처했다는 지적이다.미국의 움직임에 따라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국익을 지키는 것이 힘겨운 과제로 떠오른 것이다.
서구 여러 나라도 정권이 흔들리고, 위기에 대처할 새 지도자를 찾는 움직임이 다급하다.
우리도 2003년 한반도 위기설이 거론되는 상황에서 대선 전초전이 한창이다.
실감하기 어렵지만 언제 닥칠지 모를 국가적 위기를 관리할 지도자를 선택하는 과제가 엄중하다.
그런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이들의 면모는 별로 미덥지 못하다. 태평한 나라를 이끌기에도 대체로 그릇들이 옹색하다.
여러 조짐이 좋지 않다. 인기 주말 드라마로 떴다던 민주당 경선은 이내 질척거린다.
상서로움과 거리 먼 인물까지 용(龍)을 자처한 것부터 우스웠지만, 용인지 이무기인지를 가리기도 전에 경선을 계속하느니 마느니 다투는 게 한심하다.
맞은 편 한나라당도 제 집안 일을 놓고 끝장 낼 것처럼 다퉜다. 집단 지도체제든 단일 체제든 간에 국민과 무슨 상관인지 모를 일이다. 이러고서 진짜 대통령 감이 나오길 어찌 기대할까 싶다.
무엇보다 개탄할 것은 상투적 지역주의와 색깔론과 음모론을 떠들며 다투느라 앞날의 비전은 모두 잊은 모습이다.
그 다툼에 사활이 걸렸다고 믿는 탓이겠지만, 정작 국민에게는 왜소하고 구태의연하게 비칠 뿐이다.
이런 때 생각나는 게 비전과 소신과 실천력을 갖춘 위기 관리 지도자다.
어느 경선 후보는 블레어 영국 총리 같은 재목을 자처했지만, 역시 위기에 떠올리는 인물은 2차대전 승리를 이끈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위대한 지도자로 기록됐지만 완고한 신념과 정치적 변신, 저돌적 추진력과 오만한 고립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그는 1874년 명문 말보로 공작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조산아였고, 보수당수를 지낸 아버지는 그가 지능 발달이 늦어 군인이 제격이라고 여겼다.
이에 따라 육사를 나와 경기병 장교로 근무했고, 보어전쟁에서 포로가 됐다 탈출해 영웅이 됐다.
이때의 명성을 바탕으로 26살에 보수당 하원의원이 됐다.
처칠은 4년 뒤 보수당의 보호무역 정책에 반기를 들고 자유당으로 옮겼다. 이후 여러 장관직을 거치면서 당시 현안인 해군력 확대에 강하게 반대했다.
군사비를 아껴 복지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소신이었다. 그러나 1차 대전을 앞두고 독일 해군의 도전이 심각해지자 해군장관을 자청했다.
그리고 해군 전함 연료를 영국에 풍부한 석탄대신 석유로 전환하는 획기적 과제를 거센 반대를 물리치고 강행해 제해력(制海力) 수호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전쟁 중에는 기관총과 참호를 앞세운 소모전의 교착상태를 깰 신무기 탱크 개발을 육군이 주저하자 해군에서 맡아 전쟁 양상을 바꿔 놓았다.
전쟁 뒤 좌파에 대한 의구심으로 보수당에 복귀한 처칠은 보수당 주류의 대독 온건노선에 반대, 10년 동안 내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념적 소신에도 불구하고 국가 안보를 위해 소련과 동맹할 것을 주장했다. 64살이 된 1940년 뒤늦게 전쟁 내각의 총리를 맡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배경이다.
우리 대선 경쟁자들과 처칠을 비교하는 것은 우스울지 모른다. 그러나 안팎으로 격동기에 처한 우리의 처지는 굳이 북한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민족의 엄중한 사태라고 할만하다.
이런 상황에서 낡은 지역주의와 음모론 따위를 논하느라 여념이 없는 인물들은 대통령 재목이 될 수 없다.
우물 밖을 내다보고 앞날을 통찰하는 안목과 지혜가 없는 이들은 이제라도 조용히 물러앉아 위인전이나 다시 읽는다면 나라를 위해 다행이겠다.
강병태 편집국 부국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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