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25일 대북 특사 파견 등을 통해 한반도 긴장 조성 예방 문제를 논의키로 한 데는 최근 제기된 2003년 한반도 위기론도 한 배경이 되고 있다.내년은 제네바 합의에 따른 경수로 건설 완료 시한이면서, 북한의 미사일 실험 발사 유예가 만료되는 시점이다. 2003년 위기론은 여기에 미국의 대북 강경자세가 맞물려 제기되는 최악의 한반도 안보 위기상황이다.
앞으로 미국의 핵사찰 요구에 대해 북한이 경수로 건설지연에 따른 손해배상 주장으로 계속 맞서게 되면 북한이 대포동 2호 미사일을 발사하는 상황도 배제할 수 없다.
이 경우 1990년대 내내 한반도를 뒤흔들었던 핵과 미사일 갈등이 동시에 폭발,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할 수도 있다. 2003년 위기론의 근거가 되고 있는 쟁점들을 조명해 본다. /편집자주≫
■핵 읽기
한반도의 '핵 시계’가 거꾸로 돌아갈 조짐이다.
미국은 북미 관계의 핵심인 1994년 제네바 핵합의의 재조정에 돌입했고, 북한은 공공연히 합의 파기를 들먹이고 있다. 제네바 합의의 붕괴는 곧 북미관계의 종말, 한반도 핵 질서의 와해를 의미한다.
북미 양국의 쟁점은 바로 제네바 합의의 이행 문제이다. 합의문은 미국이 북한의 핵 동결 대가로 지어주기로 약속한 경수로의 ‘핵심부품’을 2003년 인도하고, 그 전에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대북 핵사찰을 실시토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수로 공사는 예정보다 훨씬 늦어져 이 추세라면 전기발전기 등 원자로의 내부를 구성하는 ‘핵심부품’이 2005년께나 설치될 전망이다.
미국은 경수로 공사의 진척 정도와는 무관하게 늦어도 2003년에 특별 핵사찰을 시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남아공 등의 전례를 참고하면 북한 핵 사찰은 최소한 3년 이상 소요되므로 핵심부품의 도입 시점에 맞추려면 더 늦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지난달 13일 “북한이 핵사찰을 받을 때가 됐는데도 수용하지 않으면, 전체 경수로 프로그램이 중단될 것”이라며 미국이 먼저 제네바 합의를 재고할 가능성을 경고했다.
미국은 또 94년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서한형식으로 보장한 ‘대북 핵 불사용’약속은 아랑곳하지 않고 9일 핵태세검토(NPR) 보고서를 통해 북한을 선제 핵공격의 대상 중 하나로 지목했다.
이어 20일에는 의회에 북한의 핵합의 이행 여부에 관한 정부보증을 하지 않음으로써 대북 핵 압박을 강화했다.
그렇지 않아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잇단 강경책에 기가 죽은 북한은 분개했다. 북한은 6일 “더 이상 북미 합의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길을 가겠다”고 밝히는 등 연일 제네바 합의의 재검토를 공언하고 있다.
북측이 최근 러시아와 흑연감속로 건설에 대해 논의한 것도 제네바 합의의 붕괴를 염두에 둔 후속 대응의 일환이라는 지적이다. 북한은 핵 사찰도 핵심부품의 인도에 맞춰야 하고, 기간도 3개월이면 족하다는 입장이다.
현 상황으로는 미국의 조기 핵 사찰 요구에 북한이 불응할 게 뻔하다. 북한은 특히 경수로 공사의 지연을 ‘합의 위반’으로 보고 손해배상을 요구할 뜻을 분명히 했다. 양쪽의 ‘벼랑 끝 작전’이 충돌할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물론 양국은 공식적으로 제네바 합의를 파기하지 않았다.
북한은 엄포를 놓으면서도 경수로 협약을 지키고 있고, 미국도 협상을 통한 타결 여지를 완전히 배제하진 않았다. 북한과 미국의 공방이 내년의 ‘담판’을 선점하려는 ‘기 싸움’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밀어붙이기와 북한의 강경 맞대응이 불러올 위기를 과소평가하기에는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
여기서 남측이 대미ㆍ대북 외교를 통해 선도적으로 위기를 조율할 필요성이 나온다. 북미간 충돌이 없더라도 경수로 사업의 지체는 남한의 경제적 부담 가중으로 이어진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올 중유지원 여부 北-美관계 갈림길▼
1994년 제네바 합의의 핵심 장치 중 하나인 대북 중유 제공은 향후 미국의 대북 압박 수위를 가늠하는 시금석이 될 전망이다.
미국이 핵개발 중지의 대가로 약속한 중유 50만 톤을 올해 북한에 주지 않을 경우 북미관계는 파국을 면키 어렵다.
미 행정부는 20일 북한의 핵 의무 준수를 의회에 보증하지 않기로 결정, 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물론 부시 행정부는 표면적으로 제네바 합의 이행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놓고 있다. 전례 없이 한꺼번에 9,500만 달러의 예산을 별도로 편성해 놓은 것이 그 중 하나다.
이는 국제유가 상승을 감안하더라도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집행된 5,487만 달러와 비교하면 넉넉한 액수다.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관계자는 “미국은 핵 합의 이행을 지킬 것을 확약했다”면서 “조만간 1년 치 중유 구입비용을 입금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편성된 예산이 제때 집행될 지는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미 행정부의 대북 불신에 편승해 의회가 제동을 걸고 행정부가 이를 추인하면, 대북 중유제공 약속이 흔들릴 수도 있다.
벤저민 길먼 등 매파 의원들은 이미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북한과의 약속을 재고할 것을 요구한 상태이다.
제네바합의의 최대 분수령이 될 내년도 북미관계는 미국의 중유 공급 여부에 따라 윤곽이 그려지게 돼 있다.
■미사일 위기
로버트 월폴 미 중앙정보국(CIA) 전략 및 핵계획 담당관은 11일 미 상원 정부위원회 국제안보소위에서 “북한의 미사일 기술이 최근 3년 사이에 크게 발전했으며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ICBM)인 대포동 2호 미사일 발사 실험이 준비 단계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증언했다.
토머스 슈워츠 주한미군사령관도 이에 앞서 5일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 출석, “북한은 탄도미사일 개발 계획을 강력한 외교ㆍ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북한이 비록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유예하고 있지만 로켓 엔진 및 기타 부품에 대한 시험을 지속하고 있는 등 미사일 개발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올들어 조지 W 부시 행정부 관계자들의 북한 미사일 개발에 대한 우려 섞인 언급이 잇따르면서 한반도 위기론을 부추기고 있다. 북한 미사일에 대한 미국의 경계심은 크게 두 가지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북한이 설정한 시험 발사 유예 기간이 내년이면 종료된다는 시기적 압박감이다. 북한은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9년 9월 미사일 시험 발사 유예를 공식 발표했다.
당시 북미 베를린 고위급 회담에서 미국이 제시한 경제제재 완화라는 당근에 시험 발사 유예로 화답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북미 미사일 협상은 타결의 물꼬가 터지는 듯했다.
2000년 7월 방북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북한이 “미국이 위성을 대리발사해 주면 미사일 개발을 포기하겠다”는 획기적 제안을 내놓은 데 이어 클린턴 행정부도 이에 관심을 보이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특히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이 방북했을 때는 ‘위성대리발사 조건부 개발 포기’에 사실상 거의 합의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북미 미사일 협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여기에는 미사일방어(MD) 체제를 최우선으로 추진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전략적 계산이 큰 이유로 작용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위협을 MD 추진의 근거로 활용하려는 미국이 내심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미사일에 대한 미국의 또 다른 우려는 미사일 수출 문제다. 콘돌리사 라이스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최근 “북한은 원하는 누구에게나 미사일을 팔려고 한다”고 주장했다.
라이스 보좌관의 이 지적은 미국이 북한의 미사일 수출을 매우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같은 미국의 시각으로 미루어볼 때 북한이 미사일 시험 발사를 재개하거나 이란, 이라크 등에 미사일 수출을 확대 지속할 경우 미국이 특단의 조치를 강구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9월 장쩌민(姜澤民) 중국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을 비롯해 수 차례 2003년까지는 시험 발사 유예를 재천명한 점으로 미루어 일단 내년 말까지는 시험 발사를 강행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이전에라도 북한의 미사일 수출 과정에서 의외로 문제가 불거질 수도 있다. 1998년 이른바 ‘아미티지 보고서’를 통해 “북한 미사일 수출 선박을 나포해서라도 수출을 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리처드 아미티지 미 국무부 부장관 등 강경파가 행정부 내에 다수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윤승용특파원
syyo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