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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7)유랑극단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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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이주일(7)유랑극단 시절

입력
2002.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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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도 1960년대 중반 서울 스카라극장을 잊을 수가 없다.군예대 시절 안면을 튼 연예인을 만나기 위해서, 아니면 지방순회를 떠나는 공연단장의 눈에 띄기 위해서 극장 근처 다방에서 하루종일 죽치고 있던 때였다.

커피 값이 없어 구두닦이 옆에 앉아있기도 했다. 그러다 지방공연을 따라 가게 되면 마냥 좋았다. 일단 밥 먹는 것이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1964년 8월 군 제대 후 나는 아내와 아이들을 춘천 부모님 집에 내버려두고 무작정 서울로 왔다.

그리고는 청량리 무허가 하숙집에 기식하며 충무로 근처를 얼씬대기 시작했다.

당시 스카라극장 주변의 스타다방, 신천지다방, 대림다방 등은 나 같은 무명 연예인들이 몰려 있는 역 대합실 같은 곳이었다.

그러다 처음 찾은 일거리가 가짜 약장수들이 공장 근처에서 벌이는 쇼의 MC 자리였다.

남성 근로자에게는 정력제가 되고, 여성 근로자에게는 여성용 한방약이 되는 만병통치약을 파는 무대였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이런 일거리가 생겼는데 약장수 무대도 공연 축에 드는지 나는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가 지방 쇼단에서도 출연교섭이 들어왔고, 서울 변두리 극장무대에도 서게 됐다.

마침내 아내와 아이들을 불렀다.

서울 상계동의 단칸방이었는데 아내는 사과궤짝을 화장대로 쓰면서도 내가 대단한 연예인이 된 듯 뿌듯해 했다.

나는 지방 공연만 가면 주연배우와 어깨동무를 한 채 기념사진을 찍었고 이를 매번 아내에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대구 공연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분장실 사환 겸 보조MC였는데 메인MC가 급한 일이 있어 나를 무대에 세웠다.

남일해(南一海) 정도 되는 유명가수를 소개하는 자리였다.

“여러분이 고대하고 또 고대하시던 오늘의 스타 남일해를 소개합니다.” 이 간단한 멘트가 왜 그리 목구멍에 걸려 안 넘어오는지.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터졌다.

단장이 나를 즉각 호출한 것이다.

“이 새끼, 네가 감히 ‘아다마(주연배우)’를 소개해? 남의 쇼에 재 뿌릴 일 있어?” 그 다음부터는 말이 필요 없었다. 무자비한 주먹질과 발길질.

내 얼굴은 피범벅이 됐고 나는 그 길로 쇼단에서 쫓겨났다. 기차를 집어 타고 서울에 올라와서도 나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내게 유랑극단 시절은 각별하기만 하다.

양 훈 양석천 배삼룡씨 등 톱 스타를 따라다니며 수발을 들던 일, 외모 때문에 시골 다방 레지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하자 동남아 외국인 흉내를 낸 일 등 궁핍한 시절의 자화상이 지금도 생생하다.

무엇보다 정원을 2~3배 초과한 지방 무대의 열기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유랑극단 시절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다.

지금은 배드민턴 선수 방수현(方銖賢)의 아버지로 유명한 코미디언 방일수(方一秀)씨다.

그와 나는 60년대 중반 스카라극장 시절부터 함께 다녔는데 나의 인기 레퍼토리인 ‘수지 큐’는 이 때 개발된 것이다.

몸과 엉덩이를 따로 흔들며 원을 그리는 이 ‘수지 큐’는 그와 함께 했을 때 더욱 빛났다.

그리고 방씨는 1971년 가을 내가 유랑극단 시절을 정리하고 캐비닛 공장에 취직해 있을 때 나를 꼬셔 월남 공연을 떠나게 한 주인공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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