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3월21일 시인 이상화가 42세로 작고했다. 이상화는 자신의 본명과 소리는 같고 의미만 다른 상화(尙火)를 호로 삼았다. 그가 대구 출신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 호는 ‘경상도의 불’이라는 뜻인 듯하다. 실제로 상화는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열망하던 조국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하고 죽었다.상화는 서울 중앙고보에서 공부하고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의 학생시위를 이끌었다. 상화의 형은 중국 동북 지방에서 20여년간 광복 투쟁에 헌신하다 중국군(국민당 정부) 중장으로 해방을 맞은 이상정 장군이고, 상화의 동생은 해방 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 대한체육회 부회장, IOC(국제올림픽 위원회) 위원 등을 지낸 이상백이다.
상화는 21세에 문예지 ‘백조(白潮)’ 동인으로 시단에 나왔고, 일본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문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뒤 ‘개벽’을 중심으로 활발한 글쓰기를 펼쳤다.
1920년대 신경향파 문학을 대표하는 그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조국 광복의 열망이 절절히 배어있다. 이 시는 1970년대에 작곡가 변규백이 곡을 붙여 노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상화가 보기에 빼앗긴 들은 곧 빼앗긴 봄이었다.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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