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착한 유괴와 나쁜 유괴가 있어. 착한 유괴는 돈을 받고 아이를 돌려주기 때문에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고, 나쁜 유괴만 알려지는 거지. 그들에게 몇 천만원은 돈도 아니야. 이건 자본의 생산적인 이동이야” (극중 영미의 대사)자전거 체인을 만드는 공장의 장애인 노동자 류(신하균)는 여자 친구 영미(배두나)의 꾐으로 신부전증을 앓는 누나의 수술비를 위해 중소기업 사장 동진(송강호)의 딸을 유괴한다.
그러나 누나는 자살하고, 그가 슬픔에 겨워 누나를 묻고 있는 사이 아이는 익사했다.
아이는 “오빠 오빠”를 외쳤지만 귀먹고, 말 못하는 그는 자기의 슬픔에 빠져 아이가 빠져 죽는 것을 알지 못했다.
관객 580만명이 든 ‘공동경비구역 JSA’로 지난해 흥행 신화를 이룩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 ‘복수는 나의 것’은 이렇게 별뜻없이 시작된 연쇄 살인을 기록한다.
한국 영화의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로 자리잡은 송강호와 신세대 아이콘 신하균과 배두나 등 이름 값 높은 배우가 셋이나 출연하고 총제작비가 31억원이 투입됐다.
영화는 아이가 죽은 아버지의 슬픔이 아니라 복수라는 당위에 매몰된 인간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에 매우 부조리하고 복합적인 캐릭터와 상황이 맞물린다.
때문에 ‘아버지의 복수극’으로 관객의 심리적 일체감을 유발하는 할리우드식 영화와는 때깔이 다르다.
수술비 1,000만원을 떼어먹는 것은 물론 그의 신장 하나를 떼어간 장기밀매업자를 찾아낸 류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아들을 죽이고 그들의 심장을 꺼내 씹어 먹는다.
영미의 자취방으로 찾아온 동진은 전기고문으로 영미를 죽이고 핏물이 섞인 오줌이 흘러내리자 이불로 덮고 자장면을 먹는다. 카메라는 살인의 장면을 매우 담담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코믹한 설정도 많다.
류가 자신의 방에서 잠자고 있는 동진을 보고 집에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는 부분은 무성 영화 시대의 코미디 설정을 닮았고, 영미가 류와 정사를 벌이며 던지는 “개미 같은 놈! 개미는 예지력이 있대”같은 엉뚱한 대사는 그들의 이해 불가능한 정신세계를 엿보게 한다.
류를 잡은 동진, 아킬레스 건을 잘라 류를 얕은 물에 익사시키기 전 동진의 대사는 부조리하다. “넌 착한 놈이니까 내가 너 죽이는 거 이해하지?”
희화화한 공상적 운동권(영미), 공고를 나와 자수성가했지만 아내에게도 이혼당한 ‘불쌍한’ 부자(동진), 돈을 손에 쥔 순간 누나가 자살해 목적 잃은 유괴범(류)등 영화 속 캐릭터는 모두 부조리한 운명의 힘에 휘둘리고, 난도질로서 그들의 운명을 끝낸다.
바로 이 해석의 여지가 무궁무진한 캐릭터와 상황 설정은 평론가를 들뜨게 할 만하다.
구구한 설명 없이 상황이 비약하지만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캐릭터를 구축하는 감독의 힘 때문이다. 그 힘이 어찌나 강력한지 영화에서는 배우보다 감독 체취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한 시사회장에서 ‘구토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의 잔혹성과 복합적인 캐릭터, 교훈없는 결말은 대중적 취향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B급 영화를 좋아하는 감독의 취향이 치밀하게 형상화된 영화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평론가와 대중의 반응은 엇갈릴 것 같다. 29일 개봉. 18세 관람가.
박은주기자
jupe@hk.co.kr
■박찬욱 감독의 말
“여태껏 본 영화 중 가장 취향에 맞는 영화다.” 박찬욱(39)감독은 이번 영화를 이렇게 표현했다.
첫 시사 후 일반인보다는 감독이나 평론가의 반응이 뜨겁다.
“평론가의 영화여서는 안 된다. 이건 분명히 상업 영화다. 독특하고 새롭다는 것에 점수를 받을 것 같다. 물론 전작 정도의 성공은 기대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죽고 또 죽는다. “사적인 복수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그 내면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하드 보일드 스타일이라고 표방했음에도 곳곳에 유머 코드가 많은 데 대해 감독은 “하드 보일드는 영화가 간결하고, 건조하다는 의미다. 웃음은 반향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때로는 지나치게 과격해서 코믹한 수준에 이른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영화 속 배두나를 빌어 표현하고 싶었다.”
“도대체 왜 거기서 그 사람을 만났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게 현실인데 영화 속 세상은 외려 개연성과 객관성에 더 많이 치중하는 것 같다. 부조리한 이야기와 인물을 통해 운명의 힘 같은 것을 그리고 싶었다.”
여러 결말 중 송강호가 정체 모를 괴한들에게 살해당하는 결말을 쓴 것에 대해 “그들(살해자)은 일종의 죽음의 천사 같은 존재들이다. 운명적인 힘에 의한 복수의 종결을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감독이 차기작으로 고려중인 여러 편의 영화 가운데는 미국의 B급 영화 대부 존 카펜터의 특기인 뱀파이어 영화가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통해 주류 영화 속으로 확실히 넘어온 것 같았는데, 어느새 그는 전작 성공을 발판 삼아 또 다시 그의 마음의 고향으로 회귀를 꿈꾸고 있다. 참 박찬욱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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