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사람의 경험을 말로 듣고 기록한 구술사(口述史)가 역사학과 사회과학에서 새로운 연구방법론으로 부각되고 있다.개인의 경험에 사료적 가치를 부여하는 구술사는 그동안 역사나 사회 전체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국내에서 연구방법론으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구술사 연구결과가 잇따라 나오면서 구술사가 기존 연구방법론을 보완해주거나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최근 체험자의 구술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 중이다.
구술사가 동원되는 분야는 그 동안 문헌자료가 담아내지 못했거나 정치적 이유로 진실이 왜곡해온 현대사의 사각지대.
일본군 위안부 희생자나 비전향 장기수 또는 격동의 시기였던 해방공간 등이 그 대상이다.
이용기 서울대 국사학과 강사는 최근 역사비평 봄호에 게재한 논문에서 “지금까지는 현대사 연구가 국가 단위의 정책사나 운동사에 집중돼 왔다”며 “구술사는 공식기록에는 담기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드러내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의 허구성을 밝혀내는 대안적 역사서술”이라고 평가했다.
최근의 연구물로는 지난해 출간된 비전향 장기수 김석형씨의 생애를 기록한 ‘나는 조선공산당원이오’,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 송남헌, 식민지 시대 인텔리 여성 김선 등 동시대 활동가 8명의 구술을 수록한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기억으로 다시 쓰는 역사-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 등이 손꼽힌다.
사회학계에서는 피에르 부르디외 등 프랑스 사회학자 23명이 구술사를 동원해 프랑스 사회의 사회ㆍ경제적 질곡을 생생히 드러낸 학술서 ‘세계의 비참’(동문선 발행) 이 지난달 번역, 출간된 것을 계기로 구술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세계의 비참’은 공영주택 단지ㆍ학교ㆍ사회복지회 직원, 노동자, 농부, 등 일반인의 삶에 투영된 사회적 문제점을 심층 인터뷰를 통해 부각시켜 출간된 해(1993년)부터 프랑스에서 큰 반향을 불러온 책.
서구에서는 이미 구술사가 학문분야로 정립돼 미국 컬럼비아대 부설 구술사연구소같은 전문기관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김귀옥 경남대 북한대학원 객원교수는 “부르디외의 작업은 통계 등 양적조사에만 치우치고 질적조사에는 소홀히 한 우리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며 “앞으로 이러한 편향에 대한 반성으로 구술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99년 국내 사회학자로는 드물게 월남인 거주지역인 강원도 속초 아바이 마을에 6개월간 살면서 주민 100여명을 심층면접한 결과, “‘월남인’으로 대변되는 반공주의적인 정치의식이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측면이 크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흔히들 월남 사유를 ‘공산주의가 싫어서’라고 간주하지만 실제로 조사결과는 ‘전쟁이 싫어서’월남했으며 반공의식은 정권이 이들을 이용하면서 덧입혀진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밖에도 1차 문헌 자료가 부족한 여성학, 인류학 등에서 구술사가 중요 방법론으로 이용되고 있다.
여성학에서는 성폭력상담소를 찾는 피해여성에 대한 심층면접을 통한 논문이 나오고 있고, 인류학에서는 역사인류학회를 중심으로 특정지역의 주민에 대한 조사를 통한 문화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다.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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