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14시간 작업… 변하지 않으면 추락"그는 머리를 박박 깎고 있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박서보(朴栖甫ㆍ71) 화백.
단구지만 일흔 넘은 나이가 무색하게 다부져 보이는 체격에 까만색 스웨터와 바지를 입고 머리털을 박박 밀어버린 그의 모습 자체가, 화실 가득히 널린 ‘묘법(描法)’ 연작 못지 않은 추상 그 자체로 보였다.
“이거, 두번째 범행이오.”
그는 자기 인생에서의 첫번째 삭발 일화부터 들려주었다. 196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에 한국 대표로 단신 참석했을 때다.
“현지 매스컴에서 한국을 콩고 등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세 나라의 하나로 꼽고 있잖아. 무슨 짓을 해도 튀어볼 수가 없겠더라고. 어떻게 그들을 제압할까, 궁리 끝에 머리를 밀었지.”
당시만 해도 젊은 화가의 외국행은 참으로 힘든 기회였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참석한 대회는 막상 현지에 도착해 보니 1년이 연기돼 있었다.
요즘 같은 인터넷 통신은 꿈도 못꾸던 시절, 주최 측에서 연기를 알린 우편이 그에게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여비로 마련해간 단돈 40달러로 그는 한 해를 그곳에서 버텼고, 1년 후 이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고 귀국한다.
'묘법'연작 전통ㆍ현대 접목 "미술은 농사와 같은 노동
이후 40년만인 지난해 그는 두번째로 머리를 밀었다.
20일~4월 7일 갤러리현대(02-734-6111)에서 열리는 그의 전작전이라 할 ‘묘법 1967~2001’과 4월2~20일 박여숙화랑(02-547-7575)에서 열리는 근작전 ‘묘법 2002’에는 그의 인생 두번의 삭발 사이, 40여년의 작업 결과가 응축돼 있다.
보통 건물 2층 높이를 터 널찍하고 시원하게 만들고 자연채광이 되도록 한 그의 작업실에는 홋수로 따지면 500호, 1,000호나 될 크기 3~4㎙의 제작 중인 묘법 연작과 물감통, 캔버스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박화백은 “나는 지금도 여기서 하루 14시간씩 제작한다. 나 평생 4시간 이상 자 본 적 없어”라고 말했다.
"40년만에 두번째 삭발 평생 자기부정의 연속
“흔히 예술가라고 하는 치들은 일평생 자신을 모방하는데 그친다구. 변화해야 해. 자신에 대한 과신이 오만을 낳고, 오만을 태만을 낳지. 그러면 추락이야. 피카소는 평생 변화했잖아.”
박화백이 1960년대 후반부터 계속해호고 있는 묘법 시리즈는 그가 말하는 “평생에 걸친 지속적인 자기 부정”의 궤적이기도 하다.
초기 묘법은 주로 회백색의 캔버스 위에 연필 드로잉을 하고 이를 다시 유채로 덮고 드로잉을 반복한 것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후기 묘법이 탄생된다. 우선 재료가 변했다. 우리의 전통 재료인 한지를 쓰기 시작했다.
석 장의 한지를 세 번 바른, 즉 아홉 겹의 한지 바탕에 그는 끊임없는 반복적 스트로크로 필압(筆壓)을 가함으로써 마치 밭이랑을 만들 듯 캔버스의 골을 만들어낸다.
그 위에 여러 겹의 수성안료를 덧칠하는 행위가 다시 반복된다.
재료와 행위, 물질과 정신,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경지다.
표현하고자 하는 이미지, 내용을 떠나 그에 의하면 묘법은 미술이기 전에 “농사 짓는 것과 같은 노동”이다.
“한 작품 만드는데 한 달 이상 걸리지. 한지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은 수백 년 시간이 가도 끄떡 없어.”
이번 근작전에 출품되는 작품 중에는 빨강과 보라, 푸른빛이 도는 회색 등 새로운 색의 깊이를 보여주는 작품이 등장한다.
회백색, 흑색 톤의 무채색으로 일관했던 그의 작품세계의 또 다른 변화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기(氣)가 기(技)를 제압해야 한다.” 인터뷰 도중에도 삭발용 전기면도기, 속칭 바리깡을 꺼내 머리를 밀면서 그는 말했다.
국전 폐지운동을 주도한 젊은 미술가로,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주창자로, 35년간 홍익대 교수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낸 교사로서의 그의 남다른 에너지가 감지되는 모습이었다.
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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