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상상력 부족 때문일까, 연출가의 게으름 때문일까.TV 드라마에 도식화한 설정이 판을 친다. 동네 깡패들은 으레 당구장에서 한판 싸움을 벌이고,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에 걸리게 되는 사건은 십중팔구 교통사고다.
10일 방송한 SBS TV 수목드라마 ‘유리구두’. 부잣집 아들인 주인공 철웅(소지섭)은 당구장에 들어와 난데 없이 손님을 쫓아내는 깡패들과 시비를 벌인다.
당구대 사이로 날렵하게 날아다니며 큐대를 힘껏 휘두르는 것은 당연지사. 이것은 이미 작년에 KBS 2TV ‘순정’에서도 본 장면이다. 영화 ‘신라의 달밤’이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도 나왔던 상황이다.
당구가 청소년도 즐기는 레포츠로 인정받는 현실과는 달리 당구장을 음습한 곳으로만 기억하는 80년대식 고정관념 탓이다.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것도 걸핏하면 나온다.
‘유리구두’에서 재벌의 손녀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윤희(김현주)는 어린 시절 언니 태희(김지호)가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 동안 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어 기억을 잊는다.
KBS 2TV 월화드라마 ‘겨울연가’의 준상(배용준) 역시 자동차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리면서 민형이라는 제3의 인물로 살아가야 했다.
최근 끝난 MBC의 ‘보고 싶은 얼굴’의 여주인공 수경(이응경)도 외국에서 귀국도중 교통사고로 기억상실증에 걸려 다른 가정에서, 다른 이의 아내로 제2의 삶을 살았다.
결국 TV만 본다면 당구장은 동네 깡패들의 집합소일 뿐이고, 기억상실은 교통사고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셈이다.
문향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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