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北京) 스페인 대사관에 진입한 지 하루 만인 15일 밤 11시(한국 시간) 필리핀 마닐라에 도착한 탈북자 25명은 니노이 아키노 국제공항에서 새 삶을 향한 설렘으로 밤을 지샜다.1997년 북한을 처음 탈출했던 최병섭(52)씨의 경우 5년 고행 끝에 꿈이 현실화하는 순간이었다.
■서울행 전야
아키노 공항 당국은 장길수군 가족이 들른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찾아 온 탈북자를 맞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었다.
탈북자 일행은 공항 도착 즉시 필리핀 보안 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구내에 마련된 임시숙소로 향했다.
각국의 보도진은 이날 저녁부터 진을 치고 대기했지만 공항 당국은 “탈북자들은 모처에 격리 수용된 뒤 가장 이른 시일 내에 출국할 것”이라는 말로 취재를 막았다.
필리핀의 테오피스토 구이놀라 부통령은 “필리핀은 남북한 모두와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면서 “마닐라는 경유지일뿐이며 탈북자들은 필리핀 영토에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사관 주변 탈북자들은 이에 앞서 오후 2시 3분 미니밴 3대와 지프 1대에 분승, 차오양(朝陽)구 산리툰(三里屯) 스페인 대사관 정문을 나와 옆에 있는 소도로를 거쳐 공항으로 질주했다.
중국 당국뿐 아니라 스페인 대사관도 출발 직전까지 행선지를 밝히지 않는 등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중국 공안당국은 대사관 100여m 앞에 차단막을 치고 외부의 접근을 막았다.
스페인 대사관에는 이날 오전 11시께부터 무장 경찰, 공안 차량 등 수십 대가 갑자기 들락거리고 외신 기자 등 100여 명이 몰려 탈북자들의 제3국 추방이 임박하다는 추측을 낳았다.
한국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 “중국 당국의 신속한 조치에 솔직히 우리도 놀랐다”면서 “결국은 장길수군 가족이 길을 뚫은 것 같다”고 말했다.
■ 부드러워진 중국
탈북자들의 제3국 추방을 처음 알린 사람은 주룽지(朱鎔基) 중국 총리였다.
그는 이날 제9기 전국인민대표대회 5차 회의 폐막을 맞아 가진 기자회견에서 “중국 외교부는 관계국 대사관과 협의를 거쳐 합의에 이르렀다”면서 “조금만 참을성 있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베이징의 한 외교소식통은 AFP 통신에게 “장길수군 가족의 선례를 따른 것이기는 하지만 朱 총리가 직접 탈북자 문제를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라면서 “중국의 태도는 훨씬 더 부드러워졌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중국은 대 북한 관계를 의식하기보다는 국제적 이미지를 중시하기로 결정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중국 언론들은 이 사건을 취급하지 않았지만 네티즌들의 반응은 컸다.
한 네티즌은 “용사들이여, 훌륭하다” 는 글을 띄웠고, 다른 네티즌은 “북한 인민들은 정말 힘들다, 원하는 곳으로 보내줘야 한다”고 동정을 표시했다.
베이징=송대수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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