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화가 서울에 집중된 국내 상황에서 지방 소도시가 국제음악제를 성공적으로 치른다는 것은 기적처럼 보인다. 8일 개막한 통영국제음악제가 그러하다.세계적 작곡가 윤이상이 꿈에도 그리던 곳, 그러나 정치적 이유로 오지 못한 고향은 지금 그를 기리는 제1회 통영국제음악제로 출렁이고 있다.
시민들의 관심이 놀랍다. 7일 전야제를 포함해 16일까지 열흘 간, 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리는 20여 회 공식연주회 중 빈소년합창단의 전야제, 창원시향의 개막연주, 정명훈과 프랑스 라디오필의 폐막연주는 일찌감치 매진됐고 나머지 공연티켓도 절반 이상 팔렸다.
축제 사무국은 전체 공연의 객석 점유율이 80%, 그중 유료관객이 60~70%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낯선 현대음악이 다수 초연되는 행사에 이만큼 관객이 들기는 이례적이다.
작년과 재작년, 이 축제의 워밍업에 해당되는 통영현대음악제를 할 때만 해도 외지에서온 작곡가와 연주자 등 음악가들의 잔치에 가까웠다.
그러나 국제음악제로 탈바꿈한 올해는 통영 시민들이 공연 관람 뿐 아니라 매표, 진행 등 축제전반을 돕는 자원 봉사에 적극 나서 축제가 시민 속으로 파고든 느낌이다.
통영시민문화회관 아래 한 슈퍼마켓 주인은 “표가 없어서 못 산다. 시민 모두 이번 축제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택시를 타고 아무 설명 없이 ‘페스티벌 하우스’(구 통영군청 별관)로 가자고 하면 바로 데려다 준다.
축제 사무국으로 개조된 이 건물과 그 앞 800㎙의 윤이상 거리를 비롯해 시내 곳곳에는 축제를 알리는 깃발과 현수막이 걸렸다.
외지에서 오는 이들을 위해 숙박과 공연 티켓을 묶은 1박 2일, 2박 3일의 패키지도 300장 가량 팔려 마리나리조트 등 주요 숙박시설이 붐비기 시작했다.
절반은 서울에서, 절반은 부산 마산 진주 등 인근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이다.
행사 예산 9억원 중 6억원을 투자한 통영시는 행정력을 집중하고. 공무원들도 축제의 성공을 위해 무엇이든 돕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일하고 있다.
통영국제음악제의 미래를 낙관하게 만드는 징후는 객석에서도 감지됐다. 9일 오후7시 30분 스위스 아마티 현악4중주단 공연의 관객 수준은 서울보다 오히려 높아 보였다.
윤이상과 브람스, 빌트버거의 대중적이지 않은 프로그램에도 불구하고 대극장 800석을 꽉 채우고 진지하게 음악에 몰두하는 모습이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밤 늦은 시각에 열리는 소극장 연주회들도 객석이 3분의2까지 찼다.
남편, 두 아이와 함께 아마티4중주단 공연을 찾은 주부 김옥자(34)씨는 “윤이상 선생의 고향 통영에서 이런 국제음악제가 열리는 데 대해 시민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며 “다른 연주회도 두개 정도 더 볼 것”이라고 말했다.
8일 밤 9시 소극장에서 열린 이탈리아 피아니스트 베르톤치니의 독주회에서 만난 최민주(17ㆍ통영여고2)양은 “우리 학교 교가도 윤이상 선생이 작곡했다”며 “고향땅을 못밟고 돌아가신 그 분을 뒤늦게 기리게 된 것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생전에 거장이 받아야 할 대접을 제대로 못해준 안타까움 탓일까. 윤이상의 혼이 되살아난듯 통영은 그를 기억하는 자리에 뜨겁게 동참하고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개막공연 지휘 트라비스
이번 축제에 참가한 많은 음악가 중에도 개막공연 지휘자 프란시스 트라비스(81)의 감회는 특별하다.
현대음악 전문 지휘자인 그는 윤이상의 오랜 친구로서 1967년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윤이상이 체포되자 국제적 구명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2000년 윤이상 오페라 ‘심청’의 한국 초연을 지휘했다. 이번 축제의 개막곡 ‘서주와 추상’도 1982년 대한민국음악제 중 윤이상 음악의 밤에 그가 한국 초연했던 곡이다. 당시 상황을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거리에 경찰이 쫙 깔려있었죠. 숙소인 서울시청 앞 프라자 호텔에서 세종문화회관까지 가는 데 세 번이나 검문을 당했습니다. 결국 공연이 늦게 시작됐는데, 객석에서 누가 총을 쏘지나 않을까 걱정하면서 지휘를 했지요. 지금은 공기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 것을 느낍니다. 이제 그의 이름으로 국제음악제까지 열리니,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윤이상과 그와의 첫 만남은 1958년 도나우에싱엔 음악제에서 였다. 윤이상을 통해 동양에 눈을 떴고 한국 중국 일본 작품을 연주하게 됐다고 한다.
“그의 음악은 엄청난 긴장과 집중을 요구하기 때문에 연주하기 어렵고 편안하게 들리지도 않지만, 놀라운 깊이와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불편하다고 기피할 게 아니라 호기심을 갖고 과감히 접근해 이해를 시도해볼 것을 권합니다. 음악은 디즈니식 오락이나 휴식용이 아니지 않습니까.”
트라비스는 거장 헤르만 셰르헨의 보조지휘자로 출발해 여러 국제음악제에서 활동했으며 스위스 방송교향악단에서 10년간 지휘와 성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미국 태생이지만 베트남전 참전에 항의해 미국 국적을 버리고 스위스에서 살아왔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시력이 안좋은 것만 빼곤 건강과 열정을 잃지 않고 있는 현역이다.
오미환 기자
mhoh@hk.co.kr
■잘츠부르크 못잖은 국제음악도시 기대
성공적인 예술축제는 도시를 바꾼다. 잘츠부르크, 루체른, 빈, 바이로이트 등유럽의 유명한 음악제는 음악가 뿐 아니라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아 지역 경제에 큰 몫을 한다.
몇몇 도시는 작곡가의 고향이라는 후광을 누린다. 이를테면 모차르트의 잘츠부르크, 베토벤의 본, 그리그의 노르웨이 베르겐 등이 그렇다.
통영은 2년 전 국내 행사로 음악제를 처음 시작할 때 독일 도나우에싱엔을 모델로 연구했다. 독일 남서부 인구 2만의 이 작은 도시는 우리나라로 치면 읍 정도 밖에 안되는 비교적 외진 곳이다.
도나우 강의 발원지라는 점 말고는 이렇다할 관광자원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 80년이 넘게 열리고 있는 현대음악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윤이상도 이 음악제를 통해 이름이 알려졌다. 이를 보러 오는 외지인이 도나우에싱엔 인구보다 훨씬 많은 수만 명이나 돼 인근 도시의 숙박시설까지 동이 나버린다.
1년 전 예약하지 않으면 방을 못구한다. 축제는 조용하던 도나우에싱엔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음악제가 세계적 관심을 끌면서, 평소에도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 됐다.
미국 콜로라도주 인구 6,000명의 아스펜도 음악제로 유명한 곳이다. 한때 은광으로 번성했고, 지금은 스키장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여름 두 달간 열리는 음악제를 찾는 관광객은 무려 10만여 명. 음악제 관련 수입이 아스펜 경제의 40%를 차지한다.
통영의 인구는 14만 명. 잘츠부르크와 비슷한 규모다.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굳이 모차르트를 내세우지 않아도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는다.
통영국제음악제 또한 윤이상을 디딤돌 삼아 그 너머로 전진해야 할 것이다.
■자원모임 '황금파도'
월드컵에 ‘붉은 악마'가 있다면, 통영국제음악제에는 ‘황금 파도’가 있다.
황금 파도(대표 배상석ㆍ45ㆍKT 통영지사장)는 이번 행사에 맞춰 태어난 통영시민들의 자발적인 지원 모임이다.
발족한 지 보름 밖에 안됐지만, 회원이 1,500명이나 된다.
황금 파도라는 이름은 통영국제음악제를 통해 통영이 세계적인 음악도시, 관광도시로 거듭남으로써 부흥하기를 바라는 뜻을 담고 있다.
수산업에 기반을 둔 통영의 지역 경제가 최근 최근 바다 오염과 한일어업협정등의 영향으로 침체를 겪고 있는 데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있다.
이러한 염원은 동판에 새겨져 축제 사무국이 있는 페스티벌하우스 입구 돌 받침대에 안치됐다.
이 동판은 황금 파도가 7일 통영시 항남동 바닷가 문화마당에서 마련한 통영국제음악제 성공 기원제에서 페스티벌하우스까지 800㎙의 인간 띠에 의해 손에서 손으로 전달됐다.
황금 파도는 식당 주인, 학원장, 꽃집 여주인 등 개인들이 10만~50만원씩 내놓은 돈 1,000만원에 지역 기업체의 후원금, 회원 회비로 3,500만원을 모아 축제 음악회 표 4,000장을 사서 그중 2,500장을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어린 세대 중에서 제2의 윤이상이 나왔으면 하는 희망을 담은, 미래에 대한 투자다.
배상석 대표는 “이번 축제에 대한시민의 관심은 깜짝 놀랄 정도”라며 “소설가 박경리, 시인 김춘수, 극작가 유치진, 화가 전혁림 등 많은 예술가를 배출한 통영의 긍지와 에너지가 다시 폭발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7일 기원제는 꽃샘 추위 속 야외에서 치러졌는데도 1,500여 명이 2시간 넘게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음악회를 볼 때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윤이상 선생에 욕이 된다는 생각에 다들 모범생처럼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음악을 알든 모르든, 윤이상 선생에 대한 통영인의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황금 파도는 이번 행사가 끝난 뒤로도 매월 한 번 이상 음악회를 여는 등 꾸준히 활동함으로써 통영국제음악제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데 앞장설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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