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에 따른 구조조정의 삭풍이 우리 경제를 휘몰아치던 4년 전 이즈음에 금융계의 이목은 온통 제일은행에 쏠려 있었다.경영정상화를 위해 8,000명의 직원 가운데 2,000명 이상이 명예퇴직으로 은행을 떠나는 은행권 사상 최초의 대규모 감원사태 때문이었다.
가장 안정된 직장으로 통하던 은행이 퇴출과 합병, 대량해고의 가시밭길로 접어드는 순간이었다.
그후 4년간 금융권은 어느 분야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혹독하고 철저한 구조조정을 치렀다.
수치상으로 보더라도 26개 은행이 절반 이하인 12개로 줄어들었고, 30개에 달하던 종금사는 겨우 5개만 남았다. 인력은 금융권을 통틀어 10만명 이상이 감소했다.
이렇게 살을 도려내고, 뼈를 깎아낸 금융 구조조정은 성공작인가. 적어도 경영성적표만을 보면 그런 평가도 가능하다.
평균 12%를 넘던 부실여신 비율이 4%대 이하로 낮아지면서 은행권은 지난해 5조2,000억원이라는 유례없는 순익을 맛보기에 이르렀다.
과감한 금융 구조조정을 기피하다가 복합불황의 늪에 빠져 도무지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일본을 생각하면 절로 가슴을 쓸어 내리게 된다.
그러나 은행의 속사정을 한 꺼풀만 벗겨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눈부신 경영성과부터가 거품이다.
대부분 은행들이 고유의 예대마진을 통해 돈을 벌어들인 게 아니라 폭발적인 카드사용 수수료 증가로 수익을 남겼다.
은행의 노력보다는 운이 좋았던 셈이다. 카드로 재미를 본 은행들은 너나없이 카드사업을 확장하고, 마구잡이로 가입자를 늘리는데 열중하면서 신용남발이라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신용을 생명으로 하는 금융기관들이 수익성이라는 집단최면에 빠져 스스로 신용질서를 파괴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대출행태도 과거에 비해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렵다. 대부분 은행들이 위험부담이 높은 기업대출은 외면하고, 위험이 널리 분산되고 수익성이 양호한 가계대출에만 매달려 대출의 편중화 현상이 도를 더해가고 있다.
지난 4년간 은행권의 가계대출은 100조원 이상 늘어났고, 전체 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대에서 50% 수준에 육박한다. 기업 투자활동에 쓰였을 100조원이 가계의 소비활동에 쓰인 셈이다.
선진국에 비하면 우리의 가계대출 비중은 아직 높은 것은 아니라고 은행들은 항변하지만 문제는 짧은 기간동안 가계의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는 점이다.
이런 가운데 금리가 오르고 주식 부동산의 자산가치가 폭락하는 사태가 온다면 신용위기가 올 수밖에 없다.
한 시중은행장은 올 연말쯤이면 은행 빚을 갚지 못하는 가계 대출자들이 속출, 농가부채 탕감과 비슷한 조치가 필요할 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금융기관들이 외형적 성장에 도취해 선진 금융시스템 구축이라는 구조조정의 목표를 상실한 채 신용을 남발하는 자기파괴식 경쟁에 몰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은행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구조조정을 하던 4년전의 초심으로 돌아가기를 당부한다.
배정근 경제부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