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때 일이 생각난다. 당시 우리는 참으로 어수선한 시대를 살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몇 년 지나지 않은 그 시절의 서울 중심가에 있었던 남대문 국민학교.남대문 바로 옆에 전차 정류장이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남대문 지하도에는 떡볶이 장사들, 어묵 장사들이 어린아이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 지하도를 지나야 학교에 갈 수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유혹에 노출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마음대로 사먹을 수있는 아이들이 있었는 가하면 그렇지 못한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새까만 얼굴에 코를 훌쩍이며, 옷에서 이가 기어 나오는 아이들과 향긋한 비누향을 풍기는 깔끔한 아이들이 뒤섞여 있었다.
선생님들은 또 학교에 낼 기성회비를 못 낸 아이들의 이름을 거침없이 불러 새까만 아이들을 기죽이곤했다.
진짜 ‘그일’이 일어난 것은 그런 복잡 다난한 시대적상황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일생에서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남자로부터 눈에서 별이 번쩍하도록 뺨을 얻어맞은 것이다.
이제는 그 아이의 이름도, 얼굴도 전혀 기억이 나지않지만 당시 그아이의 분노에 찬 눈빛은 때때로 나를 일깨워 주곤한다.
사건의 발단은 이렇게 기억된다. 그 아이는 항상 야단맞고 기성회비 때문에 집으로 다시 가야하는 부류에 속해 있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그것이 부당하게 생각되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조금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쨌든 어느 봄날, 나는 그 아이가 교실을 비운 사이에 그 아이의 책상속에 몰래 수련장과 빵을 넣어두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누가 했는지 전혀 모를 거라고 생각하고.
그 아이가 달려와 내뺨을 때릴 때나는 억울하고 아프고 당황스러워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지만, 그 순간 나는 나의 잘못을 이미 깨닫고 있었다. 그의 자존심을 짓밟은게 문제였다.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가난하고 불행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회학을 전공한 뒤 여성운동과 사회운동에 몸담아 왔지만 때때로 나의 행동이 또 뺨 맞을 일이 아닌가 반성하곤 한다.
지금도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하고 있지만, 수 십년을이 사회에서 속고 이용당하고, 또 무시당하면서 살아오신 할머니들이 우리 시민단체를 못미더워할때 나는 그아이의 분노에 찬눈빛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달래곤 한다.
지은희·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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