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칠레월드컵은 2년전 대지진 참사를 딛고 성사됐다. 당초 서독(현 독일)과 아르헨티나가 유력한 후보였으나 “우리에겐 아무 것도 없다”라는 칠레의 호소가 먹혀 개최권을 따냈다. 아시아(한국)와 아프리카(모로코) 국가가 모두 유럽국가와의 플레이오프에서 패해 유럽 10개국과 중남미 6개국이 참가했다. 특히 공산권 5개국이 참가, 돌풍을 일으켰다. 대회 4강이 브라질 체코 유고 칠레 등 남미와 동구의 대결장이었다.사회주의 축구는 52년부터 80년까지 올림픽을 계속 제패했을 정도로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프로가 주체인 월드컵에서 지금까지 우승하지 못한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월드컵에 출전할 때마다 선수 망명을 우려, 계속 선수단을 감시함으로써 단조로운 생활리듬이 선수들의 창의력을 둔화시켰다는 분석이다. 경기의 기복이 적고 교과서적인 플레이를 함으로써 월드컵이 모든 참가국의 리그전으로 펼쳐진다면 소련(현 러시아) 등 공산권 국가의 우승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당시 세계축구계의 중론이었다.
58년 월드컵에 첫 선을 보인 소련은 60년 제1회 유럽선수권 우승과 64년 제2회 대회 준우승 등 당시 결승진출 후보로 꼽혔으나 8강전서 세계 최고의 GK 야신이 석연치 않게 2골을 허용, 홈팀 칠레에게 1-2로 패했다. 칠레대회는 또 월드컵 폭력화의 시초가 됐다. 개막 4일만에 퇴장 4명에 부상자 50명이 나왔다. 언론은 풋볼이 아니라 풋복싱이라고 비난했다. 칠레선수들은 대회전 ‘칠레 월드컵은 미친 짓’이라고 보도한 이탈리아 선수의 코뼈를 부러뜨리는 등 폭력적인 경기 끝에 2_0으로 승리하기도 했다.
물론 이 대회서 가장 돋보인 팀은 브라질이었다. 펠레는 멕시코전서 5명을 제치는 화려한 기교를 선보이며 골을 넣었으나 조예선 체코전서 대퇴부 부상이 악화, 다음 경기부터 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펠레의 대타 아마릴도가 훌륭히 제 몫을 해냄으로써 이탈리아에 이어 2연속 우승을 이루었다.
이 대회서 스페인은 아르헨티나 출신 디 스테파노, 헝가리 주장 푸스카스, 파라과이의 마르티네스, 우루과이의 산타마리아 등 용병을 귀화시켜 우승을 노렸으나 브라질에 1_2로 패해 조예선서 탈락했다. 스페인은 월드컵 사상 가장 화려한 용병군단이었다.
유승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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