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 수도 암만의 밤거리에 붉은 네온 사인이 켜졌다. 오후 9시 중심가인 슈미샤니거리. 서울 명동에 해당하는 이곳에 하루밤의 낭만을 찾는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목이 좋아보이는 자리에 ‘카라아(성ㆍ城)’라는 상호가 얼른 눈에 띈다. ‘바(Bar)’라는 간판 주변에서 점멸하는 불빛이 손짓을 하고 있다. 나이트 클럽에 이어 요즘 암만에 잇달아 생겨나고 있는 접대 여성을 둔 술집이다.문을 열고 들어서니 라이브 노랫소리가 귀를 때린다. 아랍의 노래는 절규하는 듯 가슴을 울린다. 홀 가운데 4평 남진한 무대 위에선 이목구비가 선명하고 키가 훤칠한 30대 여인이 마이크를 잡고 몸을 흔들고 있다.
어깨를 완전히 드러낸 민소매 셔츠에 하체에 딱 붙은 청바지 차림. 낮에 거리에서 목격한 ‘보통 아랍여성’들이 얼굴을 완전히 가리거나 적어도 천으로 머리를 감추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4 개의 테이블에선 비슷한 차림새의 여 종업원 대여섯명이 손님에게 술을 따르고 어울려 춤도 추고 있다.
이슬람 율법에 따르면 남녀의 춤은 물론, 술을 먹고 파는 것 모두가 ‘금기’지만 이제 요르단에선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정치와 경제의 실험
대표적인 세속 국가인 터키가 아닌 다른 여러 이슬람 국가에서도 술에 대한 금기, 여성 차별로 대표되는 전통들은 구습이 되고 있다.
변화의 흐름은 국왕이 전권을 행사하는 정치 체제와 부존자원에 의존한 단순 경제 구조에서 탈피하려는 최근 움직임에서 극명하게 감지된다.
군주 일가가 전권을 행사해 온 바레인은 14일 입헌군주제를 선포하고 10월24일 총선을 치른다. 선출 의회는 걸프 연안 산유국 협의체인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 가운데 쿠웨이트에 이어 두 번째. 바레인은 한 술 더떠 여성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주기로 해 국제사회를 놀라게 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카타르 등은 ‘포스트오일’ 시대에 대비해 경제구조 개혁에 박차를 가하는고 있고, 부존 자원이 부족한 요르단 같은 나라들은 정보기술(IT) 육성을 통해 탈출구를 모색하고 있다.
경작 가능한 땅이 국토의 5 %에 불과한 요르단은 최근 북부 아질론에 실리콘 밸리를 본 뜬 IT 단지 조성 계획을 세우고 외국 투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2000년 기준 1인당 국민 총생산이 1,650 달러에 불과하는 등 만성적인 빈곤을 타개하기 위한 조치이다.
IT 붐 조성은 불가피하게 사회 전반의 모습을 바꿔 놓고 있다. 국영 파스트링크와 민영 모바일 콤 등 양대 이동통신사의 경쟁으로 휴대폰 보급률은 이미 40 %에 이른다. 신 시가지인 압둔 상가의 단말기 판매점 폰 톤(PhoneTone)의 아흐메드 알리얀(20)씨는 “대학생 이상 젊은 층 뿐아니라 초등학생도 휴대폰을 사러 온다”고 말했다.
▼율법은 율법, 변화는 변화
자연스레 세대간 갈등이 불거지고 있다. “친구들과 한 두 잔 술 마시는 것은 문제될 게 없다고 봅니다.” 무슬림인 요르단대 배삼 자하란(27ㆍ경제학 석사)씨는 이슬람 전통의 변화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세대 간의 변화일 뿐이라고 본다.
그는 “이슬람 율법이 성립할 당시에 생각할 수 없던 일이 지금 너무도 많다”며 “인터넷을 하느냐 마느냐를 어떻게 코란의 가르침에 따라 정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술집 카아란의 지배인 모하메드 노하(43)씨도 “나의신은 알라”라며 자신의 직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아심 알 자우비(48ㆍ요르단대 경제학부) 교수는 생각이 다르다. 요르단 사회의 세속화를 “전통에 따라 절제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인가”라고 반문하고있다.
왕정 일체의 체제, 비판 언론 봉쇄 등의 문제들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슬람 국가에서 민주주의는 요원하다는 지적도 많다. 카타르의 로이터 특파원인 인도 출신의 케다르 샤르마(59)씨는 “쿠웨이트 등의선거는 가짜”라며 “언론도 대부분 100 % 정부 소유여서 진정한 자유화의 목소리는 철저히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요르단 거리에서는 윤락가를 찾을 수 없는 대신 거리 매춘이 번지고 있다. 생계를 위해 국경을 넘은 이라크 여성들이 우리 돈으로 1만원도 채 안 되는 5디나르에 몸을 팔고 있는 실정이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동남아 여성들을 알선하는매춘조직도 국경을 넘어 들어와 있다. 요르단의 에이즈(AIDS) 감염자가 200 명을 넘었다는 소식은 이슬람권의 세속화가 맞닥뜨린 부작용의 단면이다.
암만ㆍ도하=김범수 기자
bskim@hk.co.kr
■'아랍의 CNN' 알 자지라 방송
“알 자지라의 힘은 자유로운 논쟁에 있습니다.”
지난 해 9ㆍ11 테러 이후 오사마 빈 라덴의 녹화 테이프 독점 방영,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 현장 생방송 등으로 성가를 올린 카타르 위성방송 알 자지라의 아흐메드 슈우리(45) 부국장은 이 방송의 성공 요인이 가감 없는 진실 보도라고 말했다.
1996년 첫 송출 후 5년만에 ‘아랍의 CNN’이라는 별칭을 얻은 알 자지라의 성공사례는 언론사에 유례가 드문 것이다. 지난해 말 세계무역기구(WTO) 총회가 도하에서 열렸을 때 카타르를 모르는 사람들이 “알자지라(반도 또는 섬이라는 뜻)의 수도가 도하냐”고 물었을 정도다.
알 자지라는 카타르의 면모도 쇄신하고 있다. 근해에 쏟아져 나오는 기름과 가스 말고는 변변히 내세울 것 없던 인구 60 만의 소국 카타르는 이슬람권의 진로, 인권 문제 등 국제적 논쟁의 줌심지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 알 자지라의 성공이 갖는 의미는 다른 데 있다. 카타르를 포함해 아랍 각국은 최근 몇 년 사이 언론사에 배치한 보도 통제관을 철수시키는 등 검열 제도를 완화했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은 안팎의 통제를 가하고 있다.
가장 큰 한계는 대부분의 신문ㆍ방송이 국영이라는 점이다. 집권 세력의 언론 장악은 이슬람권의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로 지적되기도 한다.
알 자지라도 1억 4,000만 달러 규모의 전액 정부 지원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아랍권에서는 드물게 ‘독립 언론’ 방침을 훼손 받지않고 ▲아랍국 경찰의 고문 ▲일부다처제 ▲이슬람과 민주주의 공존 문제 등 이슬람 세계의 금기사항들을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다.
리비아 등 몇몇 국가는 이에 항의해 카타르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타르 집권 왕가는 주눅들지 않고 “알자지라는 민영방송”이라며 불간섭 원칙을 견지하고 있다. 이는 광고 수익과 특종 기사 판매 등으로 운영비의 70% 가까이를 충당하고 정부 지원금을 갚을 여력까지 생긴 상태다.
슈우리 부국장은 “테러범들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방영한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알 자지라는 누구의 편에도 서 있지 않다”면서 “고여 있는 탁한 연못과 같은 아랍 언론에 새 물결을 쏟아부어 정화시키는 역할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도하=김범수 기자
bskim@hk.co.kr
■알 자지라 어떤 방송인가
알 자지라는 카타르 수도 도하에 본사를 둔 뉴스와 시사 인물 인터뷰, 대담 전문위성 방송이다. 1996년 11월 매일 6시간 방송으로 출발해 3개월 뒤 12시간, 1년 뒤 전일로 방송 시간을 늘렸으며 대부분 아랍어로, 하루 3~4시간 정도 영어로 방송한다.
세계 31개 국 특파원 60 명을 포함해 모두 400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으며 영국,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인도 등 28개 해외 지국을 운영하고 있다. 시청자는 평균 2,000만 명, 최대 3,50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국내 방송은 일절 하지 않는점이 한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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