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2년 2월26일 프랑스의 문인 빅토르 마리 위고가 브장송에서 태어났다.1885년 몰(歿). 위고는 시ㆍ소설ㆍ희곡분야에서 열정적인 글쓰기를 수행하며 19세기 프랑스 문학에 낭만주의의 성채를 쌓았다.
그의 5막 운문극 ‘에르나니’가 초연된 1830년에는 그를따르는 고티에, 네르발 등 낭만주의 문학 청년들과 이른바 ‘삼일치의 법칙’을 신성시하는 고전극 지지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극장 안에서 벌어졌다.
프랑스 문학사에서 흔히 ‘에르나니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논쟁은 낭만파의 승리로 끝나 고전극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삼일치의 법칙이란 하나의 사건이24시간 안에 한 장소에서 전개돼야 한다는 연극의 규칙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연원을 둔 이 법칙은 다소 왜곡된 채 17세기 프랑스 고전극작자들에 의해 확립됐는데, 위고는 희곡 ‘크롬웰’(1827)의 서문에서 고전주의를 비판하며 삼일치의 법칙 가운데서도 특히 시간의 일치와 장소의일치는 지나치게 불합리한 구속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위고의 정치적 이념은혁명과 반동 사이를 오간 19세기 프랑스 역사 속에서 몇 차례 변화를 겪었다.
그는 왕정복고기에는 왕당파에 가까웠고, 7월왕정기에는 자유주의와 인도주의로 기울었으며, 2월혁명 뒤에는 확고한 공화파가 되었다.
여기까지는 시세에 영합했다는 느낌이 있지만, 위고는 그 뒤로 죽을 때까지 공화파로 살았다.
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로 제2제정을 수립하자 그는 이를 비판하고 망명길에 올라 19년을 벨기에와 영국 해협의 섬들에서 살았다.
한국 독자들에게 위고는‘파리의 노트르담’과 ‘레미제라블’의 작가다. 집시처녀 에스메랄다, 성당의 종지기 카지모도, 장 발장과 그를 뒤쫓는 자베르 경감 같은 이름들은우리 귀에도 익숙하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