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학에서 철학 전공 교수한 분을 초빙하는데 박사 학위 소지자 50여 분이 지원했다.철학박사 학위 취득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말할 나위가 없는데 반(半) 실업 상태의학위 소지자가 이 토록 많았다.
그러니 철학을 전공하려면 구도의 길보다 더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지방의 어느 대학에서는 학부제를 운영한 결과지원하는 학생이 없어서 철학과가 사라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철학과 다음으로 위험한 학과는 사학과라는 예측도 사학을 전공하는 교수들간에 심심찮게 이야기되고 있다.
예전에 ‘문사철(文史哲)’이라 하여 인문학의 꽃이자 경세(經世)의 필수과목이라 여겨져 온철학과 사학이 이렇게 무너지고 있다. 문학이 아직까지는 버텨주고 있는 게 다행이라고나 할까.
인문ㆍ자연과학 찬밥 신세
성리학적인 질서가 자리잡고 있던 조선시대에는 지배층으로 편입하기 위해서는 문사철을 집대성한 유교경전을 평생토록 익혀야만 하였다.
성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지배층은 도덕적으로 훌륭해야 하고, 경전 학습을 통해 인문학적 소양을 쌓노라면 도덕적으로 훌륭해진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글은 인품을 드러낸다고 하여 문을 중시하고,과거 역사를 잘알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고하여 역사가 중시되었다. 도덕그 자체와 등치된 철학이 중시된 건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렇게 문사철내지 인문학이 중시되던 오랜 전통은 산업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빠른속도로 변해갔다. 문제는 그속도가 너무 급하다는 점에 있다.
내가 대학 진학을 생각하던 1970년대 초만 해도 대학은 학문의 전당이고 당연히 오늘날 기초학문이라 불리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고 있던 문리과대학이 그 중에도 핵심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공과나 의과는 기술자 양성소 정도로, 상과는 장삿속을 배우는 곳 정도로 생각하는 분위기가 상당히컸다.
그러던 것이 1980년대와 90년대를 지나면서 불과 20여년 만에 기초학문이라 할 수 있는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은 찬밥 신세가 되어 버렸다.
물론 인문대학 안에서도(절대 영문학이나 중문학이 아니라)영어나 중국어를 배워 밥벌이에 도움이 될만한 분야는 학생들이 몰리지만, 역시문과에서는 절대적 다수가 법학ㆍ상경계열로 몰린다.
그리고 이과에서는 의학ㆍ공학분야로 몰린다. IMF 사태로 고도성장의 신화가 물거품으로 변할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공황을 겪은 뒤로는 안정된 직업을 구하기 위해 대학이 고시를 준비하는 기관정도로 바뀌었다.
갈수록 인문ㆍ자연과학 분야의 대학원 진학률이 떨어지고 있다.
인문학이나 순수과학 분야의 고학력자가 대학이나 그에 준하는 연구기관에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할수 없는 상황에서 누가 그 외로운구도의 길을 걸으려 하겠는가.
하물며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가 ‘새해복 많이 지으세요’로 바뀌어도 부족할 판에 어느새 ‘새해 부~자되세요’가 세상을 휩쓸게 된 마당에 있어서랴.
연구 계속할 수 있게 해줘야
나는 물론 농업이 경제의 기초가 되던 사회에서 배태된 성리학적 질서가 오늘날까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런사회에서 중시되던 문사철의 지위를 고스란히 회복하자고 고집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이 비정상적으로 단기간에 이루어진 만큼 그 속도에 비례하여 나타나는 문제점을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무한경쟁에 수반되는 공멸(共滅)을 피하고 공생(共生)을 위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하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대책을 숙고하는 이들은역시 그늘에서 기초학문을 지켜가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BK21로 지원을 받는 경우 대학원생에게 지원이 주어지지만 그들이 졸업한 뒤엔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 외에 기초학문 종사자들이 연구를계속할 수 있는 연구소가 정책적으로 뒷받침되어야 한다.
윤혜영ㆍ한성대 역사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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