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일지(47)씨는 신작 ‘마노 카비나의 추억’(민음사 발행)을 ‘영화소설(시네로망)’이라고 부른다.읽히기 위한 목적으로 쓴 시나리오를 그렇게 규정한 것이다. 작품은 시나리오의 형식을 갖췄지만 영화 제작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삼는다.
쉰 살의 독신 교수 서인하와 스물 세 살의 분방한 대학생 강수미의 ‘변죽만 울리는’ 관계는 하씨 소설의 독자들에게는 낯익은 것이다.
시인인 서인하의 문학 기행 프로그램에 따라 나선 강수미는 시집 대신 만화책을 읽는 여자다. 한두 달 만에 남자친구를 갈아치운다는 강수미를 못마땅해하면서도 서인하는 서서히 강수미에게 빠져든다.
여자를 향한 욕망을 힘겹게 누르는 서인하와 달리 강수미는 동행한PD, 작가, 카메라감독, 운전기사와 쉽게 관계를 맺는 여자다.
“제발 내 사랑도 받아 줘”라고 애원하는 서인하에게 강수미는 “교수님은 여자를 너무 진지하게 생각해요. 언젠가 교수님은 저를 죽일 거에요”라면서 거부한다.
“마노 카비나에서는 모든 게 달랐어”라고 중얼거리며 서인하가 면도칼로 손목을 긋는 것으로 작품은 끝나지만, ‘마노 카비나’라는 장소는 마지막까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마노 카비나’라는 간판이 걸린 카페(‘카비나(cavina)'는 슬로바키아어로 ‘카페’라는 뜻이다)의 사진, ‘마노 카비나의 추억’이라고 제목을 붙인 서인하의 시집, ‘마노 카비나에서 나는 보았네’로 시작되는 서인하의 혈서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등장하지만, 정작 마노 카비나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비워 놓았다.
당연하게도 독자가 채워야 하는 공간이다. 마노 카비나는 억압에서 해방된 사랑으로부터 깃털처럼 가벼운 환멸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장소가 된다.
읽기위한 시나리오 형식 교수와 분방한 여대생의 변죽만 울리는 관계 그려
하씨의 인물이 여전히 욕망의 무게에 짓눌려 헐떡이긴 하지만, ‘영화소설’이라는 새로운 형식은 문제적이다.
일찍이 소설 ‘경마장 가는 길’에서 작가의 개입을 철저하게 억제하고 영화 카메라로 ?f는 것 같은 묘사로 충격을 주었던 하씨는 이제 시나리오라는 극단적인 형식을 실험한다.
이 시도는 묘하게도 그의 소설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하씨 소설이 독자에게 계속해서 인지시켰던 것은 ‘작품과의 간극’이었다.
인물과 함께 웃고 울면서 감정을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잘라내면서 독자의 위치를 끊임없이 인식하도록 했다.
그러나 하씨의 작품이 영화의 형식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이상한 반응이 생긴다. 책을 읽는 사람이 인물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독자는 장면을 따라 가면서 머리 속에서 인물의 말과 행동을 상상하고,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제발 받아줘”라는 서인하의 탄식은 소설에서처럼 짜증스럽기만 한 대사로 여겨지지 않는다. 욕망의 상처 때문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쉰 살의 남자는 불쌍하고 애처롭다.
하씨는 1980년대 중반 프랑스 유학 시절 한 사람의 작가로서 평생을 두고 할 수 있는 일이 구체적으로 얼마나 될까 따져 본 결과19편을 산출했다고 했다. ‘마노 카비나의 추억’은 그때 구상했던19편 중 하나이며, 그의 12번째 책이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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