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였는지모르겠다. 설이 가까워오자 아버지는 순창 장으로 설빔을 하러 가셨다. 아침에는 날씨가 좋았었는데, 오후가 되자 눈보라가 퍼붓기 시작했다.우리들은 동구를 바라보며 눈이 빠지게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아버지께서는 동구에 나타나시지 않았다. 우리들은 걱정이 되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날이 어둑해지자눈보라가 더 거세어지고 있었다. 나와 내 바로 밑의 동생은 아버지를 마중 나가기로 했다.
우리들은 눈보라를뚫고 마을길을 벗어나 작은 들길로 접어들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저 앞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우리들은 눈보라 속을 향해 아버지를불렀다. 바람결에 아버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등에는 하얗게 눈을 뒤집어 쓴 보따리가 짊어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눈을 하얗게 뒤집어 쓴 보따리를 풀어놓자 그 속에서는 우리 6남매의 옷과 신발과 양말, 그리고 설에 쓸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 날밤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옷을 입어보고 양말을 신어보며 우리 여덟 식구들의 그 기뻐했던 모습들이 오늘도 눈에 선하다.
섣달 그믐밤은온 식구들이 모두 목욕을 했다. 가마솥에 물을 데워 큰 물통에 붓고, 그야말로 묵은 때를 완전히 벗겨냈던 것이다. 그리고 설날 아침 우리들 앞에는새 옷과 새 양말과 새 신이 놓여졌다. 새 옷을 입은 우리들은 차례를 지내고 아버지 어머니께 세배를 드렸다.
오랜만에 고기를 넣은 떡국을 먹은 우리들은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기 전에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꼭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새 해 첫날이다. 오늘 싸우면 일년 내내 재수가 없승게. 오늘은 절대로 누구와 말다툼도 허지 말고, 싸우지도 말고 그냥 조용하게 지내야 혀 알았쟈.”
해가 뜨면 우리들은 오랜만에 하얀 무명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지 뒤를 따라 뒷산에 있는 산소에 갔었다. 그리고는 동네에 돌아와 집집이 돌아다니며 세배를 하고, 오랜만에 깨끗한 모습으로 아랫목에 앉아 있는 동네 어르신들에게 일일이 나이를 대고 덕담을 듣고 음식을 먹었다.
세월이 갔다. 설날이 가까이 다가오면 순창 장으로 갈담 장으로 설빔을 하러 다니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우리들은 자라서 모두 일가를 이루어 이 나라 곳곳으로 민들레 씨처럼 흩어져서 산다.
내 바로 밑의 동생은 서울에서 살고, 그 아래 동생은 부산에서 살고, 그 아래 누이는 대전에서 살고, 또 그 아래누이는 군산, 제일 막둥이는 경남 남해에서 산다. 나는 전주와 시골을 오가며 살고 어머니는 홀로 시골집에서 벌도 키우시고, 작은 텃밭에다가 고추배추 상추 같은 채소도 가꾸시며 산다.
설이 되면 우리 모두 그 곳, 우리들이 벌거벗고 자랐던 어머니가 사시는 그 그리운 강 마을로 달려간다. 언제 보아도 다정한 강굽이야, 반갑고도 반가운 강 언덕에느티나무야, 마루에 서 보면 안도의 큰 숨이 절로 나오는 앞산아.
오랜만에 돌아온 집. 방마다 불도 켜고, 우리 집 앞 길 청소도 하고 마당도 쓸고, 텃논에 서서 동구 밖으로 고개를 기웃거리며 아직 오지 않은 아우들을 기다리기도하고. 오랜만에 만난 벗들과 반가워라 얼싸안고 그 동안 안부도 묻는다. 모두 나이들이 들었구나. 만날 때마다 이마에 잔주름이 늘어나 있는 동무들을 볼 때마다 우리들은 옛날이 그리운 것이다.
설날 아침이 되면우리들은 또 차례를 지낸다. 가족들이 방 안 가득 찬다. 홀로 남으신 어머니께 세배를 드리고 세뱃돈도 타고, 아이들을 데리고 옛날 아버지가 그랬던것처럼 뒷산에 있는 산소에 간다.
평안하고 아무 욕심 없는 며칠을 지내고 나면 우리들은 또 우리들이 살 곳으로 흩어져야 한다. 남해로, 부산으로. 서울로, 대전으로, 군산으로. 어머니는 설에먹다 남은 음식들을 조금씩 여기저기 담아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준다.
차를 타는 아들 딸들에게 늘 어머니는 “몸조심 허고, 건강들 혀야 헌다. 돈이고 뭇이고 다 소용없다, 건강이 제일이여” 하신다. 아버지께서 눈보라를 헤치고 순창 장에서 돌아오시던 그 길로 우린 고향을 떠나간다. 올해도 우리 모두 어머니의 염려덕으로 몸 성하게 지내자 아우들아.
김용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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