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주차장에서 차 세워둔 곳을 늘 잊어버려 헤맵니다’ ‘왜 나는 아침 에 출근할 때마다 안경을 어디에 벗어 둔지 몰라 소동을 벌이는 것일까요’ ’114에 문의해 확인한 전화번호 8자리. 분명히 기억했다 싶은데, 왜 막상 다이얼을 돌리려 하면 끝자리가 생각나지 않지요’40대가 넘어서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이런 ‘건망증’(absent_mindness)증세는 중ㆍ장년층을 곤혹스럽고 우울하게 만든다.
매일 신문에 난 퍼즐을 풀거나, 시를 외우고, 수학문제를 풀고, 아니면 고스톱이라도 해서 기억 쇠퇴를 막으려 안간힘을 다한다.
★ 건망증은 질병이 아니다
기억을 연구하는 성균관대 응용심리연구소 박희경 연구원은 “건망증은 죄가 아니다”는 말로 기억의 메커니즘을 말한다.
머리카락 빠지는 것처럼, 점점 약화하는 근육처럼 건망증도 자연스런 노화과정이라는 것이다.
박 연구원은 “잊는다는 것은 기억한다는 행위의 중요한 부분”이라면서 “요점을 알기 위해서 세부사항은 잊어버리거나 지나쳐야 하듯, 가장 강력한 기억을 갖추기 위해선 잊을 수 있는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대 정신과 기억장애클리닉 조맹제 교수는 “건망증은 환자에게 나타나는 치매(dementia)나 기억상실(amnesia)과는 다른 정상인의 정상적인 기억 현상”이라면서 “건망증으로 진단된 집단의 상당수가 치매로 진행됐다는 보고는 있지만,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 주의를 집중하고 기억을 부호화해라
최근 한 TV 프로그램은 최면요법을 선보이면서 우리의 기억력이 카메라 필름처럼 외부 정보를 보관하고 있다고 소개했지만, 뇌 연구가들은 이는 오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기억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의 정도와 틀에 따라 저장용량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즉, 외부 정보를 처음에 받아들일 때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억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박희경 연구원은 이를 ‘기억 부호화 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억을 부호화하려면 주의를 분산시키지 않는 게 중요하다.
114로 확인한 새 전화번호로 막 다이얼을 돌리려 하는데, 누군가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면 분명 제대로 정보를 입력할 수 없을 것이다.
TV뉴스를 보다 휴대폰이 울려 받았다고 하자. 아마 뉴스에 정신이 팔려 평소 두는 위치가 아닌 소파 밑에 무심코 휴대폰을 던져둘 수 있다.
제대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행동은 부호화가 안 돼 기억 자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어떤 사람을 소개받은 후, 다시 만나니 얼굴은 알겠는데 누구인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주의가 부산한 상태에서 만난 인물에 대해서는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는 감만 있을 뿐, 그 사람과 나의 관계까지 떠올리는데는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건망증은 나이 탓이 아니다. 다른 일로 방해받거나, 다른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을 피하고 주의를 집중하면 훨씬 기억력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뇌리에 정확히 각인됐다 하더라도, 머리 속에서 정보를 제대로 꺼내지 못해서 발생하는 건망증도 많다.
프리젠테이션을 앞두고 중요한 자료를 너무 잘 보관한 나머지, 막상 프리젠테이션을 하려고 할 때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해낼 수 없는 경우가 벌어질 수 있다.
진땀 흘려 찾다 보니, 회의장 옆 장식대 위에 자료를 올려놓은 것을 발견했다.
잊을까봐 잘 보이는 곳에 보관한다는 것이 그만 건망증을 발생하게 한 것이다.
‘자료=장식대(ㅈ=ㅈ)’같은 적절한 단서를 마련해 두었다면, 건망증을 예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무 익숙한 일은 습관적, 자동적 행동으로 나타나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역시 건망증 사례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안경을 머리 위로 올리고는 안경이 없어졌다고 찾아 헤매거나, 열쇠를 손에 쥐고 열쇠를 찾으러 다니는 일이다.
★ 과거 기억보다 미래 기억이 문제다
최근 심리학자들은 기억의 메커니즘을 앞으로 해야 할 일을 기억하는 ‘미래(prospective) 기억’과 이전에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과거(retrospective) 기억’으로 구분하고, ‘미래 기억’에 대해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 못하는 ‘과거기억’은 한순간 창피한 일로 끝나지만, 점심 약속을 해 놓고 깜빡 잊어 상대방을 바람맞히는 ‘미래 기억’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 불에 냄비를 올려놓고 불끄기를 잊거나, 아이를 픽업해야 하는데 깜빡 잊어버려 데리러 가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라.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매일해야 할 일을 적고 수시로 체크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 좋다.
★ 기억력 저하를 막으려면
성균관대 심리학과 이정모 교수는 기억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의미부여, 조직화, 연합, 시각화, 주의력 강화 등 5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문제가 주어졌을 때 자신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해 이해를 하고, 개별 정보는 동식물이나 같은 색깔끼리 하는 식으로 조직화해 묶은 후 기존 혹은 외부 정보와 연관시켜 기억을 하라는것이다.
시각적 모양을 연상시키는 것도 기억을 잘 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아이가 학교에 실내화 가지고 가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려면 현관문에 실내화를 걸어두는 장면 같은 것을 연상해 보는 것이다.
또 반드시 주의를 집중해 정보를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서울대 윤종철 정신과 전문의는 “심리적 상태에 따라서도 기억력은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서 “불안, 우울증, 과도한 스트레스는 중년의 기억력 감퇴에 영향을 주는 주요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인지운동ㆍ섭식으로 뇌노화 막는다
기억력 쇠퇴는 노년기의 불가피한 증상일까. 성균관대 심리학과 이정모 교수는 크게 네 가지 이유 때문에 노령화에 따른 기억력 감퇴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첫째, 나이가 들면 청각, 시각 등 감각이 둔감해진다. 새로운 자극을 맞이했을 때 정확하게 정보처리를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둘째, 정보처리 속도도 느려진다. 재빨리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기억해 놓은 정보조차 다시 빨리꺼내 쓰지 못한다.
상황이 조금이라도 복잡해지면 초기 정보처리가 늦어져 그 이후 정보 처리는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중단한다.
공장의 콘베이어벨트 작업장에서 초기 작업이 잘 안 될 경우 이후 작업이 계속 엉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셋째, 정보처리를 하는 작업 공간 자체가 작아진다. 즉 기억 용량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젊었을 때 일을 처리하는 용량이 책상 두 개였다면, 점차 작업대 크기가 줄어들어 책상하나 크기가 된다는 것이다.
넷째, 관련되지 않은 정보를 걸러내거나 억제하는 통제 능력이 저하된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불필요하거나 쓸데없는 정보나 자극은 무시하고 억제해야만 실제 추진하는 일에서 최대 효과를 볼 수 있는데, 나이가 들면 이런 간섭 억제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노화가 진행될수록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하지 못하고, 말 실수가 잦고, 이상한 결정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뇌의 정보처리 능력 저하는 우리의 노력에 따라 늦출수도 있고 보완할 수도 있다. 이 교수는 뇌의 노화를 막는 가장 중요한 전략으로 운동과 섭식을 꼽는다.
운동은 보통 팔다리의 움직임으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조깅, 무용, 에어로빅 등을 잘 하려면 움직임을 계획하고, 연결, 통제,조정하기 위한 고도의 인지적 작업이 필요하다.
뇌의 왕성한 활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또 산딸기, 당근 등 항산성 음식도 뇌기능 향상에 도움이 된다.
뇌의 정보처리 속도를 빠르게 하려면, 여러 가지 인지적 작업을 꾸준히 할 필요가 있다.
크로스워드 퍼즐을 매일 풀어보는 것도 좋고, 고 서정주 시인처럼 산이름이나 지명 암송 연습을 하는 것도좋다.
기억 용량을 늘리기는 어렵겠지만, 계속 업그레이드는 시킬 수 있다. 시중에 나와있는 기억술 관련 책을 읽어보고, 자기나름대로 적합한 기억 전략을 개발해 볼 수 있다.
불필요한 정보에 주의가 산만해지는 일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어보거나, 녹음을 해 다시 들어보면서 쓸데없는 생각이나 말을 주변에 흘리지는 않았는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모니터하는 일도 필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일은 주위사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유지하도록 노력하는 일이다.
넓고 깊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야말로 인지능력을 향상, 유지시키는 근본이다.
송영주기자
yj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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