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심야에 전격적으로 이뤄진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무장관의 경질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정권은 출범 9개월만에 전환점을 맞았다.취임 이래 관료와의 싸움으로 외무성은 바람잘 날이 없어 외교가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고이즈미 총리는 다나카 전 장관의 경질을 주저해 왔다. 정권 탄생의 1등 공신에대한 정치적 의리도 고려했겠지만 그보다는 경질에 따른 정치적 손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다나카 전 장관의 대중적 인기는 여전히 높고, 특히 여성 유권자의 지지는 압도적이다. 그가 외교기밀비 사건으로 도덕성이 도마위에 오른 외무성 관료집단을 상대로 벌인싸움을 두고, 지식층은 장관 자질론을 거론했지만 대중은 ‘외로운 정의의 싸움’이라는 시각마저 보였다.
더욱이 다나카 전장관의 싸움은 자민당과 관료집단내 ‘개혁 저항세력’의 존재를 환기, 고이즈미 총리 내각의 지지율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특정 비정부기구(NGO) 대표의 아프가니스탄 부흥회의 참가 문제를 야당이 물고 늘어져 정기국회가 겉돌면서 고이즈미 총리는 양자택을 강요받았다.
본격적 구조개혁의 관건인 정기국회를 정상화하느냐, 지지율 하락을 감내하느냐의 기로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결국 구조개혁을 택했다. 취임 9개월이 지나고도 구조개혁에 아무런 성과가 없고 경제의 뒷걸음질만 부각, 언제 국민적 불만이 폭발할 지 모른다는 정세 판단의 결과이다.
이번 경질로 여전히 70%대를 유지하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의 지지율은 하락을 피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다나카 전 장관에 개혁 이미지를 덧씌운 대중의 인식으로 보아 경질을 개혁 후퇴로 받아 들일 가능성이 있다.
취임 이래의 항수였던 높은 지지율이 변수로 바뀌었다는 점에서 고이즈미 총리가 맞은 최초의 정치적 위기이다.
자민당 주변에서는 ‘고이즈미 방어선’이 무너졌다는 얘기도 나오기 시작했다. 일단 물꼬가 터진만큼 ‘저항세력’의 반격이 본격화할 것이라는 관측도 무성하다. 오랜집안 싸움으로 상처만 남은 외무성의 분위기를 수습, 마비된 외교 기능을 단기간에 회복시켜야 하는 과제도 무겁다. /
도쿄=황영식 특파원
yshwang@hk.co.kr
■'돌출'장관·'밥그릇'관료 동반퇴진
‘외무성 개혁’을 외치며 일본 최초의 여성 외무성 장관으로 취임했던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장관의 경질은 일본 정치와 관료집단의 실태 등에 대해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선 자민당 내 무파벌 정치인으로 외무관료에 적대적이던 다나카 장관과 외무관료의 최고위직인노가미 요시지(野上義二) 외무성 사무차관의 동시 경질은 일단 관료를 길들이려던 정치인과 관료측이 다같이 다친 결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여기에 외무성에 엄청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면서 다나카 장관과 ‘견원지간’인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 자민당 중의원 의원 운영위원장의 당직 사퇴까지 더해져 사태의 배경에 초보 개혁 추진 장관에 대한 관료와 그 뒤를 봐주는 ‘족의원’의 ‘집단 따돌림’이 깔려있었다는 해석도 나온다.
사태의 직접적 계기는 최근 일본에서 열렸던 아프가니스탄 재건 지원 국제회의 중 비정부기구(NGO)분과회의에 외무성이 정부에 비협조적인 일본 NGO의 참가를 막으려 했다는 논란에서 비롯됐다.
야당이 이 문제를 물고 늘어지자 다나카 장관은 스즈키 위원장이 외무성에 압력을 넣어 외무 관료들이 자신에게 보고도 없이 NGO를 뺐다는 취지로 답변했다. 그러나 노가미 차관은 스즈키 위원장의 개입을 전면 부인했다.
다나카 장관은 25일 기자회견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내 말을 믿어 달라”고 호소했으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진상규명은 접어둔 채 3자를 모두 물러나게 하는 수습책을 택했다.
중요한 회담에 결석하고 “외무성은 복마전”이라고 발언하는 등 좌충우돌해온 다나카 장관의 행각과 도중하차는 정치인 장관의 자질론과 더불어 관료의 집단 이기주의의 심각성도 제기한 것이다.
무엇보다 산적한 외교현안을 앞에 두고 사소한 문제로 정치권과 관료가 진흙탕 싸움을 벌여 의회와 외무성 업무를 사실상 마비시키는 어이없는 경위는 일본 정치의 무기력한 현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 셈이다.
도쿄=황영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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