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가졌던 의문 하나가 최근에 풀렸다. 따져보니 4년 만이다.우리 경제가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진입한 직후로, 당시 경제부 근무였는데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가끔씩 들렸던 선술집에서의 일이었다.
50대 중반 노동자 차림의 사람들 4명 정도가 옆에 앉았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동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것을 들었다.
"왜 환율이 그렇게 갑자기 뛰는줄 알아? 환율이라는 것이 뭐야? 달러 값이야. 우리 경제가 망해서 부자들이 미국이나 다른 나라로 도망치려고 하니 달러가 필요하고, 그들이 달러를 사 모으니 환율이 급등하는 것이야."
그 때는 환율이 천정부지로 솟던 시기였다. 달러당 2,000원은 시간문제라는 말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던 때였다.
언론에서 연일 환율을 크게 취급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인들의 관심이 그렇게 높은 줄은 미처 몰랐었다.
'강의'의 사실 여부를 떠나 그는 무척 진지했고, 확신에 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얼마 전 그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을 '증명'하는 보고서가 발표됐다. IMF의 '외환위기 때의 외화 수요'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 보고서는 한국이 1997년 12월을 전후로 원화 가치가 급락하고 국가부도 위험이 가중되면서 원ㆍ달러 환율이 추가로 급등하기 전에 미국 달러를 확보하려는 수요가 나타났으며, 이에 따라 60억~75억 달러 가량의 보유 외환이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통화수요 함수 분석 결과 97년 12월 한국의 총통화는 외환위기 이전보다 4~5% 감소했는데, 이는 극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지적했다.
외환위기 때 달러 확보는 일반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은 일부계층의 '달러 사재기'로 97년 11월말 현재 외환 보유액의 30%를 소진했다고 덧붙였다.
간단히 말해 외환위기 당시 외국투기세력의 공격과는 상관없이 국내 기업과 일부 부유층은 '달러 사재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 한편에서는 서민들이 '국난을 극복 하자며' 장롱 속에 넣어두었던 금붙이까지 꺼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사실로 밝혀지면 몹시 당황하고 낙담하게 하는 그런 일처럼, 당시를 회상하는 것은 너무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금 모으기 였던가. 그 IMF 보고서는 보아서는 안 될 문건이었던 것 같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연일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또 증폭되고 있어 어디가 시작이고 끝 지점이 어디쯤인지 알 수 없는 요즘의 각종 부정 부패도 따져보면 이 같은 맥락이다.
'부패한 가운데서도 발전하는 나라, 발전하면서 동시에 부패하는 나라.'
김수환 추기경의 우리 사회 진단이다. 김 추기경은 연초 '삶의 지혜'라는 주제로 가진 감사원 초청 강연에서 "무슨 게이트니, 무슨 리스트니 해서 고질적인 부정부패의 중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짧은 시일 내에 선진국 대열의 문턱에 서 있다"고 말했다.
그 원인은 배금주의다. 돈을 벌겠다고 애를 쓰다 보니 발전을 가져오고, 돈을 벌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 보니 부정과 비리가 나타나는 것이라고 김 추기경은 설명했다.
연초에 언론들은 아르헨티나 사태를 다투어 보도했다.
그 중에서도 한 TV가 보여주는 현장 화면은 말 그대로 '비극'이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을듯한 나라가 왜 저 모양이 됐을까 라는 의문은 화면을 보니 어느 정도 풀렸다.
시민들은 먹을 것과 일자리를 달라며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는 반면 시내 최고급 레스토랑과 유흥가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다.
예금 인출 제한조치 시행 전 상류층이 달러로 바꿔 해외로 인출한 돈은 은행 예치 달러의 40%에 달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 비극의 주범이 고위층 부정 부패라는 것은 이 TV만의 결론이 아니다. 거의 모든 언론의 공통 사항이다.
"세계화 시대에서 국가 최고 경쟁력은 바로 정직과 성실이다"는 김 추기경의 강조가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이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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