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하늘 아래에는 다양한 삶과 문화가 존재한다. 1,000만 시민이 한데 어울려 살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지역별로 또 집단별로 전혀 다르면서도 결코 서로 동떨어지지 않는 서울 사람들의 이야기는 거울 속에 비친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달동네에서 강남의 부자동네까지, 왁자지껄한 시장바닥에서 명품 전시관까지, 야학교실에서 대학 연구소까지….
자칫 지나쳐 버리기 쉬운 서울사람들의 삶과 그 애환을 더듬어본다.≫
/편집자주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불리는 관악구 신림7동 산101 일대 난곡마을.
‘난(蘭)’이 무성한 골짜기 난곡마을에 재개발 바람이 몰아치면서 주민들이 하나 둘씩 보금자리를떠나 1만3,000여평의 대규모 달동네는 철거를 눈앞에 둔 폐허로 변했다.
난곡동 사람들의 ‘발’이었던 시내버스 96번, 160번 종점은 이 마을이 시작되는 곳이다.
여기서부터 폭 5~6m의 좁은 길이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펼쳐져 있다. 차도ㆍ인도의 구분도 없다. 올라가는 차량과 내려오는 차량이 만날 때면 행인은 길 가장자리로 몸을 피해야 한다.
한때는 1만5,000여명의 주민들에겐 큰길로 통했지만 500여 세대 1,500여명이 남은 지금은 난곡동 사람들보다 등산객 만나기가 더 쉬워진 곳이다.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다 보면 ‘세입자의 대동단결주거권을 쟁취하자’는 현수막과 ‘경축! 주택재개발 사업시행인가 취득’이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 밑으로 1970년대를 연상케 하는 비뚤어진 간판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가게들을 지나면 ‘역사속으로’ 사라지는 달동네 주택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난곡동 큰길을 따라가면 양 옆으로 생선가시처럼 좁은 골목길이 끝없이 뚫려있다.
폭 1m 남짓한 골목길 안쪽으로는 쓰다 버린 LP가스통과 연탄재, 버려진 가구, 세탁기 등 세간살이와 철거되고 남은 폐자재 등이 어지럽게 널려있다.
빈집 서너 곳을 지나야 영하의 날씨에 얼어붙은 빨래감들이 널린, ‘버젓한 살림집’을 볼 수 있다.
그 위로는 전기줄이 복잡하게 얽힌 파란 하늘과 도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TV안테나가 초행자의 눈길을 잡는다.
난곡동 2,500여 가구중 1,700가구는 이미 이주를 끝냈고 그중 700여채는 철거된 상태다.
아직 떠나지 못하고 남은 아이들은 빈집과 공동화장실 등을 놀이터 삼아 뛰어 놀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담벼락에 휘갈려 쓴 붉은 철거번호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문을 열어놓아야 도둑도 갖고 갈게 없다”며 안방문까지 열어놓았던 난곡 마을은 이웃사촌의 옛 모습은 간 곳 없고 인기척에 놀란 견공들의 울음소리만 메아리치는 ‘도심의 섬’으로 변해 마지막 겨울을 보내고 있다.
60년대 후반 청계천 등 시내 판자촌이 철거되며 조성된 난곡동은 봉천동과 사당동등 80년대 후반 몰아친 재개발 바람에도 꿋꿋이 남아 ‘영원한 서민촌’ 자리를 유지했다.
그러나 2005년까지 이 일대를 포함해 5만2,000여평의 대지에 20층 규모로 3,300여 가구가 들어서는 아파트단지 재개발계획이 지난해 1월 확정되면서 난곡동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다.
평균 300만원의 전세집에 사는 이들에게 이주문제는 가장 큰 현안이다.
임대아파트 입주권이 확보되더라도 보증금 1,000만원과 월세 15만원 가량의 비용은 단순노동자나 독거노인들이 많은 주민들에게는 너무 버거운 조건.
또 이주비용으로 4인 가족에게 주어지는 660만원으로는 서울시내 어디에서도 이삿짐을 풀어 놓을 만한 곳이 없다.
난곡동에서 15년을 살아온 하주태(45)씨는 “정부와 개발주체인 주택공사가 제시하는 조건으로는 옮겨갈 데가 없습니다. 임대아파트 이주권도 ‘그림의 떡’인 형편인데, 우리보고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장기 저리융자 등의 현실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그냥 이대로 살게 해주는 게 주민 전체를 위한 정책일 겁니다”고 하소연했다.
서울의 다른 철거지역에서 밀려온 사람들과 IMF후 사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에서 퇴출돼 수입이 끊긴 저소득층, 또 생활능력이 없는 독거노인 등으로 구성된 1,500여명의 마지막 난곡동 사람들은 그 어느 해보다도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다.
염영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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