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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 佛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생애와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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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세 佛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 생애와 사상

입력
2002.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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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세계적 사회학자ㆍ철학자ㆍ문화비평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으로 1990년대 이후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던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24일 밤 파리에서 지병인 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부르디외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성향 분석을 학문의 초점으로 삼은 사회학자이자 인간ㆍ사회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 철학자로서는 칼 마르크스, 막스 베버, 에밀 뒤르켐을 잇는 고전적 사회과학의 석학이었다.

또한 교육, TV와 라디오등 미디어, 문학과 미술에서 패션까지 문화활동 전반을 아우르는 관심사를 사회 비판으로 연결시킨 면에서 그는 장 폴 사르트르, 미셸 푸코 등을 잇는유럽적 전통의 참여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부르디외는 1930년 프랑스 남동부의 소도시 베아른의 전형적인 유대인 소부르주아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나중에 이 지역의 민중적 기질에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명문 파리고등사범학교(ENS)를 졸업한 그는 박사학위논문을 쓰지 않았다, 교육제도라는 권위에 저항한 첫번째 도전이었다.

철학을 전공한 그가 사회학에 경도한 계기는 파리대학 예술학부에서 레비 스트로스, 레이몽 아롱의 조교 생활을 거치면서.

아롱의 강의 시간에 그는 사변적인 스승과 자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그가 1981년 프랑스 최고의 학술기관인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취임한 것은 아롱의 후임자로서 였다.

1968년 파리고등연구원에 유럽사회학센터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한 그를 따른 동료ㆍ제자들은 이른바 부르디외 학파로 일컬어진다.

1981년 이후 부르디외는 줄곧 콜레주 드 프랑스 및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학교 교수로 재직해왔다.

파리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부르디외는 5년여 알제리에 체류하며 인류학에 몰두, 서구문명의 충격으로 알제리 원주민들이 겪는 문화 박탈을 연구했다.

귀국 후 그가 출간한,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고등교육제도에 대한 일련의 비판적 저서는 1968년 5월 혁명의 이념적 기반이 된 것으로 평가된다.

1960년대 말부터 그의 사상의 2단계가 전개된다. ‘재생산’ ‘자본주의와 아비투스’ ‘구별짓기’ ‘예술의 규칙’ ‘세계의 비참’ ‘텔레비전에 대하여’ 등 30여 권에 달하는 저서를 내는 정력적 활동을 한 그는 사망 직전까지 병상에서도 동료학자의 원고를 검토했다고 한다.

부르디외는 이 시기에 자본주의 사회구조는 물론 정치ㆍ경제와 문화ㆍ예술, 특히 그것을 장악하고 인간을 억압한 권력의 문제를 엄밀한 학적 방법론으로 비판했다.

어떤 방식으로 인간이 사회적 존재가 되는지를 설명한 ‘아비투스’ 등 그가 창안한 개념들은 이미 현대 인문사회과학의 기본 용어가 됐다.

부르디외는 일생 동안 어느 정당에도 가입한 적은 없지만 보수화한 좌파와 구별되는 ‘좌파 중의 좌파’로 불렸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빈민, 노동자, 이민, 실업자를 위한 저항운동에 직접 뛰어들면서 그는 미국 주도 세계화를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가장 무책임한 형태”이며 “조종사 없는 항공기처럼 위험하다”고 맹비판했다.

시기가 행동하는 사상가로서의 그의 활동의 3기라 할 수 있다.

‘세계화의 위대한 경멸자’로 불렸던 그는 2000년 5월 1일 노동절에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과 노동조합, 시민단체가 연대한 투쟁 모임을 주도, 귄터 그라스 등 세계지식인들의 연대를 이끌어내기도 했다.

부르디외는 1970년대 초 ‘재생산’이 영미 학계에 가장 먼저 번역되면서 세계로 알려졌다.

한국에서 그는 사회학보다는 문학비평 분야의 글이 먼저 알려져 관심을 모았고, 1980년대 말 이후에야 저작이 소개되기 시작했다.

1988년 ‘사회적 정의’가 첫 번역된 후 1994년 ‘혼돈을 일으키는 사회과학’이 번역됐으며, 1995년 도서출판 동문선이 20여 종의 부르디외 책을 계약하고 지속적으로 펴내고 있다.

국내 학자들의 책으로는 여러 학자들이쓴 입문서 격인 ‘문화와 권력’(1998), 홍성민 동아대교수가 쓴 본격 연구서 ‘문화와 아비투스’(2000) 등이 있다.

부르디외는 2000년 9월 대산문화재단 주최로 열린 ‘서울국제문학 포럼’ 참가차 방한, 국내외 문인 학자 및 독자들과 만났다.

포럼에서 발표한 ‘위기 속의 문화’와 각종 인터뷰ㆍ대담을 통해 그는 ‘이윤 논리를 앞세운 상업주의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문화적 국제주의’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세계화라는 구실 하에 지배적 위치에 있는 경제력이나 문화력이 자유화를 기치로 세력을 장악하고 있는 이 시점에, 문화의 세계주의에 동조하는 각국의 예술가 작가 학자 비평가는 경각심을 가지고 결집해야 한다.”

부르디외의 사망으로 세계는 20세기와 21세기의 전환기에 인간의 미래를 위한정신의 가교가 돼 온 사상의 거목을 잃은 셈이다.

●약력

▲1930년 프랑스 베아른 출생 ▲1956년 파리고등사범학교 졸업ㆍ교수자격시험 통과 ▲1958~60년 알제리에서 군 복무 ▲릴 대학 교수ㆍ파리고등연구원 책임연구원 ▲1981년 콜레주 드 프랑스 사회학 교수

●저서

▲재생산(1970ㆍ동문선) ▲자본주의와 아비투스(1977ㆍ동문선) ▲구별 짓기(1979ㆍ새물결) ▲혼돈을일으키는 사회과학(1980ㆍ솔) ▲상징 폭력과 문화 재생산(1982ㆍ새물결) ▲강의에 대한 강의(1982ㆍ동문선) ▲예술의 규칙(1992ㆍ동문선) ▲세계의 비참(1993ㆍ동문선) ▲텔레비전에 대하여(1996ㆍ동문선) ▲파스칼적 명상(1997ㆍ동문선) 등

하종오기자

joha@hk.co.kr

■프랑스 전역 애도물결

부르디외의죽음에 프랑스 지성인들은 좌와 우, 사상의 차이를 떠나 모두 한 마음으로 깊은 애도를 표했다.

그의 맹공 대상이었던 우파 정치인들조차 그를 기렸다.

그가 매스미디어의 획일성을 맹렬히 비난해 온 투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문과 방송은 일제히 추모 특집을 내보냈다.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24일자 1면 머릿기사로 부음을 전하고, 한 면 전체를 헌사로 채웠으며, 또 다른 한 면은 그의 저작을 발췌해 소개했다.

르몽드는 그를 ‘좌익중의 좌익’ ‘모든방면에서 투쟁한 사회학자’라고 기렸다.

3개 TV 방송도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부르디외 특집을 편성했다.

부르디외와 함께 현 프랑스 철학을 대표하는 자크 데리다는 “그는 자신의 연구까지를 포함, 사회활동의 모든 분야를 분석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으며 고도의 비판적ㆍ객관적 작업을 통해 큰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그의 학문적 동료이자 친구였던 저명한 환경ㆍ사회 운동가 호세 보브는 “부르디외는 사유와 저작을 통해 사회의 진실을 밝히고 이를 몸으로 실천했다”고 추모했다.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총리는 물론 우파인 자크 시라크 대통령도 추모 성명을 발표했다.

조스팽 총리는 “부르디외는 현대 사회학의 석학이자 프랑스의 위대한 지성”이라며“그는 자신의 작업에서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체화해 자본주의 사회 비판의 첨단에 섰다”고 칭송했다.

시라크 대통령은 “세계의 고통받는 이들에게 헌신한 그의 투쟁은 위업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고종석 편집위원이 만나 본 부르디외

기자가 부르디외를 처음 본 것은 1992년 9월 말 파리 생 미셸의 서점 프나크앵테르나쇼날에서였다.기자는 그 즈음 유럽연합이 지원하는 ‘유럽의 기자들’이라는 저널리즘 프로그램에 참석하느라 파리에 머물고 있었다.

부르디외는 바로 그 직전에 19세기 프랑스 문학장(文學場)의 구조와 지형 변모를 규명한 ‘예술의 규칙’이라는 책을 출간한 터였다.

그날 저녁 프나크앵테르나쇼날에서는 부르디외와 르몽드의 서평자 로제폴 드루아가 참가한 가운데 이 책에 대한 독자 평가회가 열리고 있었다.

일종의 판촉 활동인 셈이었다.

그 날 평가회에서 부르디외는 청중의 짓궂은 질문에 진지하고 단호하게 맞서며, 문학 작품의 초월적아름다움이란 19세기 이래 교과서를 통한 신비화 작업에 의해 날조된 것에 불과하므로 작품을 안으로부터만이 아니라 바깥으로부터도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계 사회학계의 대부라고 할 만한 노학자의 프랑스어가 다소 투박하고 어눌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95~96년 학기에 기자는 부르디외가 재직하는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그의 세미나 ‘문학생산의 장(場)과 권력의 장’에 참가했다.

기자는 그 때 그 학교의 미학-언어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는데, 언어사회학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 세미나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부르디외는 같은 대학 동료인 철학자 데리다와는 여러 모로 대조적이었다.

데리다가 그 학교의 유일한 대형 계단강의실에서 수 백 명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발언권을 독점하는데 비해, 부르디외는 열 명 남짓의 학생들로부터 개인적으로 참가신청을 받아 가족적 분위기에서 세미나를 진행시켰다.

또 첫 시간에만 자신이 발제를 했을 뿐 그 뒤로는 자신의 제자 교수들과 학생들이 돌아가며 발제를 하게 했다.

그 학기 중간쯤 기자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창간을 준비하던 문화 저널 ‘이다’ 편집진의 부탁으로 부르디외와 긴 대담을 한 적이 있다.

부르디외가 흔쾌히 대담에 응낙한 것은 기자와 안면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는 늘 제3세계 기자들이나 학생들에게 친절했다.

그것 역시 유럽ㆍ미국의 잘 알려진 언론이나 대학 교수와만 인터뷰를 하는 데리다와 다른 점이다.

기자가 부르디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대산 문화재단 주최로 2000년 9월에 열린 서울국제문학 포럼에서였다.

기자는 그 대회 조직위원회의 말석에 있었는데, 기자의 초청에 그는 몸이 매우 불편하다며 확답을 미루다가 결국 서울로 와 주었다.

이미 그 때 암이 발견된 상태였던 듯하다. 서울에서 그는 청와대 방문을 몇 차례나 고사해 주최측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자신이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받기가 싫다는 것이었다.

결국 김우창 교수의 설득으로 청와대를 방문하기는 했으나, 그는 서울에서도 포럼 자체보다는 한국의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 학생들에게 더 관심을 보였다.

부르디외는 말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상적 실천에도 엄격했던 진짜 좌파였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부르디외가 창안한 사회학 용어들

▼아비투스(Habitus)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사회적 콘텍스트가 개인에게 가르친 성향이나 기질.아비투스느 결국 한 개인 속에 각인된 사회의 흔적이다.우리 말로는 흔히 '습속'이라고 번역된다.

▼장(場:Champ)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어떤 사회적 관계의 덩어리나 행위자들이 놓인 위치의 체계.부르디외는 문학장을 포함한 문화장의 분석에 주력했다.

▼상징재(Biens symboliques)

지식이나 취향이나 교양이나 권위처럼,비록 경제적 재산은 아니지만 상징적으로 지배력을 강화하는 무형의 재산.부르디외는 계급의 재생산 과정을 분석하면서 경제적 요인을 최우선시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상징재에 기초한 상징적 지배의 상속을 중시했다.

▼구별짓기(Distinction)

자신의 계급적·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다른 계금·집단과의 차별화 전략.예컨대 한국에서 골프나 와인은 중산층이 구별짓기에 사용하는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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