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임기가 한 해 남짓 남았다.길고 모진 정치적 시련을 겪은 뒤 극적으로 청와대에 입주한 김대통령으로서 지난 네 해를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적잖을 것이다.
특히 이전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부패 추문으로 얼룩지고 있는 자신의 임기말이 허망할 것이다. 이 정권에 줄곧 적대감을 보여온 일부 언론에 대해 원망도 클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직은 남 탓을 하기에는 너무 큰 자리다.
연이어 터지고 있는 부패ㆍ독직 사건 앞에서 김대통령은 자신이 국가 및 정부 수반으로서 충분히 도덕적이고 유능하지 못했다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아직도 발톱을 거두지 않은 수구 언론을 탓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이 대통령으로서 떳떳하고 결기있게 그 언론과 맞서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은 새로운 일을 벌이기보다 벌여놓은 일을 마무리해야 할 때다.
그렇다면 김대통령이 퇴임 이전에 꼭 마무리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기자는 그것이 국가보안법의 개폐라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에 제정된 이래 한국인의 기본적 인권을 크게 제약하며 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를 갈라놓는 거대한 빙벽 노릇을 해 왔다.
제3ㆍ4공화국 때는 반공법과 역할 분담을 하기도 했고 제6공화국 초기에는 몇몇 조항이 개정ㆍ삭제되는 등 이 법은 정부 수립 이래 여러 차례의 손질을 거쳤으나, 여전히 인권을 침해하는 독소조항들이 수두룩하다.
특히 제7조 찬양ㆍ고무죄와 제10조 불고지죄는 양심 및 표현의 자유를 근원적으로 부정하는 위헌조항이라는 지적이 나라 안팎에서 많았다.
지난 1998년에는 유엔 인권이 사회도 찬양ㆍ고무죄 조항이 국제 인권규약에 어긋난다는 견해를 우리 정부에 통보한 바 있다.
또 잠입ㆍ탈출죄와 회합ㆍ통신죄를 규정한 이 법 제6조와 제8조는 법적 수준에서 남북의 접촉과 화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지금 이 법의 개폐를 선도할 사람은 김대통령 밖에 없다.
올해 대통령 선거의 예비 후보들은, 속마음이 어떻든, 보수적 유권자들의 표를 잃을 이니셔티브를 취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인권과 평화의 한 상징적 인물이 이끄는 이 정권에서 국가보안법을 역사의 박물관으로 치워버리지 못한다면 다음 정권에서는, 어느 당이 집권하든, 이 법에 손을 대는 일이 훨씬더 어려울 것이다.
김대통령은 집권 이전에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이 법을 개폐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는 지금 표를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위치에 있다. 그가 의식해야 하는 것은 역사다. 그리고 이 법 때문에 자유를 잃은 국민의 피눈물이다.
물론 그것이 김대통령 혼자의 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정부가 국가보안법에 손을 대지 못한 것이 뜻이 없어서라기보다는 힘이 없어서라는 것도 안다. 실제로 정부에서 이 법의 개폐 움직임을 보일 경우 수구 언론과 야당은 정략 차원에서 존치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벌일 것이다.
사실은 그래서 이 일을 선도할 사람이 김대통령 밖에 없는 것이다.
인권단체들이 지적하듯, 국가보안법 문제의 근원적 해결책은 폐지다. 이 법을 없애도 형법이 엄히 규정하고 있는 간첩죄나 내란죄 등은 국가의 안보를 든든히 지탱해줄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 여론과 꼭 타협해야 한다면 찬양ㆍ고무죄와 불고지죄의 삭제를 포함한 큰 폭의 개정을 마지노라인으로 설정해도 좋을 것이다.
실상 민주당은 그런 취지의 개정안을 이미 마련한 바 있다. 민주당이 선도하든 정부가 선도하든 이 정권 아래서 국가보안법을 개폐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적어도 형식적으로나마 자유민주주의를 완성하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김대통령 개인으로서는 자신에게 역사의 합당한 자리를 마련하는 길이기도 하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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