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냄새 물씬 풍기던 1999년 10월, 문경 새재공원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시작했고, 소주 두병을 비우고서야 그는 속내를 드러냈다.
“대사는 적고 궁예와 왕건에 비해 역할이 빛나지 않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영웅이기에 기꺼이 출연을 하게 됐습니다”라고.
KBS ‘태조 왕건’ 방송이 시작된 후 KBS 스튜디오와 문경 새재에서 10여차례 만나면서 점점 환해지는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것은 연기자의 몫입니다. 나만이 연출할 수 있는 견훤을 드러내기 위해 톤과 액션, 표정 연구를하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출연을 결심하면서 다른 작품이나 광고에 출연하지 않고, 2년 4개월 동안 견훤으로만 살아왔지요.”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대사도 늘어났고 견훤 역의 비중도 커졌다.
실험극장의 연극배우로 연기와 인연을 맺은 뒤 30년 동안 수십 편의 연극과 드라마에 출연한 서인석(54)이지만 “견훤 역은 내 연기생활에 꽃이자 연기인생의 분수령”이라고 단언한다.
고생과 노력을 한 만큼 연기자로서의 영광과 시청자의 환호가 따랐기 때문이다.
“10㎏이넘는 사극 의상을 입고,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촬영을 해야 했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야외에서 더운 물로 입을 녹여가며 연기를 했습니다. 전투신에서 불화살을 목에 맞는 등 숱하게 부상도 당했지만 시청자의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고 말한다.
과장스럽고 코믹하기까지 한 연기 스타일에 대해 그는 “외면적으로는 저돌적이면서 독선형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인정이 많고 너그러운 견훤의 성격을 시청자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2월 24일 200회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태조왕건’ 의 종반부 촬영이 진행되는 요즘, 서인석은 느낌이 새롭다고 했다.
제작진은 당초 견훤을 198회쯤 죽이는 것으로 계획했지만 견훤 없이는 드라마의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판단에 마지막 회까지 출연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더욱 자신감에 찬 서인석은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내용을 전해준다.
“아들의 반란으로 금산사에 유폐된 견훤은 경보대사로부터 감화를 받고 왕건 밑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하지요. 왕건은 신검의 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는데 견훤이 선봉장을 자청합니다. 군졸과 백성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지요.”
“견훤은 한 아버지가 아니라, 한 나라를 통치하는 황제의 입장에서 수많은 기회를 줬지만 마무리를 못한 신검보다는 역사적 안목이 있는 금강을 후계자로 선택한것”이라고 나름대로의 인물 분석도 한다.
자녀들과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이 가장 미안하다는 서인석은 ‘태조 왕건’ 이 끝나면 견훤을잊기 위해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했다.
“후회 없이 연기를 했다”는 서인석. “다음에는 또 다른 모습으로 만날 것”이라고 말한다.
배국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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