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은 무슬림들에게 종교를 넘어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거대한 규범이다. 종교를 삶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이슬람의 정신을 지키면서도 ‘세속주의’로 가득한 세계에 과감히 문호를 여는 것은 가능할까. 이 문제는 일찌감치 개방의 길을 선택, 오랜기간 성(聖)과 속俗)의 공존과 갈등을 경험해온 이집트에서도 여전히 풀기 어려운 숙제로 남아있다. ≫카이로 시내 곳곳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주택가마다 옥상을 뒤덮고 있는 위성방송 수신용 접시 안테나다.
고급 주택가는 물론,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낡은 벽돌집들이 즐비한 서민촌도 예외가 아니다. 한 주민은 “웬만큼 살만한 집들은 다 접시 안테나를 단다”면서 “부모들이 코란을 품에 안고‘알라’를 외치는 동안 자녀들은 유럽서 전파를 타고 온 포르노 영화에 푹 빠져있다”고 말했다.
이슬람에서는 음주를 금하지만 이집트는 ‘사카라’(맥주) ‘오벨리스크’(와인) 등 대표적 유적(지)을상표로 붙인 술을 만들어 판다.
물론 관광객들을 위한 것이지만, 내국인들도 내놓고 마시지는 않아도 별 제약 없이 술을 마실 수 있다. 호텔 바에서 히잡(머리쓰개)을 쓴 여성이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도 더러 눈에 띄었지만 눈치 주는 이는 없었다.
해질 무렵 나일강변은 데이트족들로 붐 빈다. 금기가 다름 없던 연애 결혼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대학생 사메흐(22)씨는 “요즘 젊은 층의 30% 정도는 연애 결혼을 하고 그 수는 점점 늘고 있다”면서 “물론 최종적으로는 부모의 승낙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교와 세속의 공존 이면에는 적지 않은 부작용도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성(性) 문제다.
심각한 결혼난의 부산물이기도 한 ‘혼전 성 관계’의 증가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최근 들어 경제적 부담탓에 결혼을 미뤄야 하는 젊은 연인들 사이에서 부모 몰래 혼인서약을 하고 성 관계를 갖는 ‘우르피(Urfi) 결혼’이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10대 소녀의 임신을 다룬 영화 ‘소녀의 비밀’로 파문을 일으킨 마그디 아흐메드 알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예전에 약사로 일하던 병원에서는 매일낙태, 처녀막 재생수술이 끊이지 않았다”면서 “젊은이들은 종교와 서구 문물의 영향 사이에서 극심한 정체성 혼란을 겪고 있다”고 진단했다.
매춘도 암암리에 번지고 있다. 기자 지역서 카이로 시내로 통하는 피라미드가(街)는 걸프 석유 부국들의 부유층이 즐겨 찾는 ‘매춘거리’로 알려졌지만 당국은 매춘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다. 한 현지인은 “당국도 실태를 알지만 관광산업을 고려해 눈 감아준다”고 귀뜸했다.
하지만 어두운 단면에도 불구하고 이슬람은 여전히 이집트인들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다. 화려한 외제 물건들로 가득 찬 아카디아 쇼핑몰에서 만난 대학생 하니(19)씨는 “놀러 다니기 좋아해 때론 기도를 게을리하지만 철저한 무슬림으로 사는 것이 삶의 목표”라고 말했다.
그는 또 “어떤 음악을 듣고 어떤 옷을 입느냐는 개인적 취향일 뿐”이라며 “서양 음악과 외제 옷을 좋아한다고 신앙심이 퇴색하는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에즈딘(35ㆍ통역 프리랜서)씨는 “흔히 ‘빈곤이 범죄를 낳는다’고 하지만 이집트는 남미보다 가난해도 강력범죄가 판 치는 남미와 달리 범죄율이 매우 낮다”면서 “이는 이슬람의 가르침이 삶의 규범으로 깊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종교와 세속적인 삶은 아직 ‘불안한 동거’ 상태다. 숨겨져 있던 갈등이 불거졌을 때 치유책을 찾아가는 사회적 조정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나일강 선상에서 ‘게이(동성애자) 섹스 파티’를 연 혐의로 기소된 23명이 최근 1~5년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이들에게 적용된 죄는 종교 모독과 악용, 코란 오역(誤譯) 등이었다. 국가가 개인의 성적 자유를 구속할 수 있느냐는 국내외 인권단체들의 외침은 ‘종교’의 힘에 눌려 대답 없는 메아리에 그치고 말았다.
최근 들어 진보 지식인 사회에서 코란의 현대적 재해석을 통해 변화를 꾀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지만 이들의 시도는 종교를 앞세운 사회적 폭력 앞에 번번히 좌절하고 있다.
저명한 여성운동가이자 소설가인 나왈 알 사아다위(70)씨는 지난해 한 극단주의자로부터 강제 이혼 소송을 당했다. 그가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하지(성지순례)는 우상 숭배의 흔적이며, 코란은 여성의 베일 착용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주장, 배교 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말이 왜곡 보도됐다고 해명해 간신히 승소 판결을 받아냈지만, 이 사건은 이슬람 사회 내부로부터의 변혁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새삼 일깨워 주고 있다.
사미르 파라그 이집트 국립문화원장은 “다소 어려움이 있지만 전통과 변화가 조화된 새로운 모델을 만들기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면서 “수 천 년간 수많은 침략을 당하면서 다양한 이민족 문화의 융합을 일궈냈고 1세기 가까운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지만 이슬람 정신과 아랍어를 고스란히 지켜낸 이집트의 저력을 믿는다”고 말했다.
■수리파 총본산 알 아즈하르
"이집트에는 알 아즈하르가 있다.” 이집트 무슬림들이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도 이슬람의 정신을 지켜갈 수 있다고 믿는다는 한 현지인은 그 근거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알 아즈하르는 971년 카이로에 설립된 첫 모스크(사원)로 출발했지만, 오늘날‘수니파 이슬람의 총본산’으로 통한다. 이슬람 세계의 지적 산실이자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인 알 아즈하르 대학이 있기 때문이다. 아랍권은 물론, 동남아 유럽 등 전세계 무슬림 청년들이 이곳에서 학문을 공부한 후 세계로 나가 이슬람의 가르침을 전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슬람 교리와 샤리아(율법) 뿐 아니라 교육학 의학 공학 농학 등을 총 망라하는 종합 대학인 이곳의 교육 방식은 독특하다. 정해진 코스가 따로 없이 학생들이 원하는 셰이크(교수)를 선택해 배운다. 수업도 셰이크 주위에 학생들이 원형으로 둘러앉아 대화를 주고받는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된다. 진리는 스스로 찾고 체득해야 한다는 의미다.
알 아즈하르의 그랜드 이맘(최고 지도자)이 내리는 ‘파트와’(칙령)는 법보다 강한 힘으로 이집트 사회에 영향력을 미친다. 그러나 ‘온건 이슬람’으로대표하는 알 아즈하르의 정치적 견해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나 진보적 지식인 양쪽 모두에서 공격이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알 아즈하르는 요즘 테러리스트들로 인해 왜곡된 이슬람의 참모습을 알리는데 주력한다.‘일신교간 대화를 위한 영구위원회’ 대표인 셰이크 파우지 알 자프자프는 “이슬람의 평화와 사랑, 협력과 공의를 가르치는 종교”라고 거듭 강조하면서“일부 잘못된 무슬림들의 행동 때문에 이슬람의 교리 자체가 왜곡되고 있는데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종교의 가르침과 믿는 자들의 행동 사이에는 괴리가 있을 수 있다”면서 “하지만 기독교나 유대교, 불교도들이 죄를 저지를 땐그들의 종교를 문제 삼지 않으면서 유독 이슬람에 대해서만 모든 문제를 종교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슬람은 언제든세계,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모든 일신교와 대화하고 협력할 자세가 돼있다”면서“이스라엘이나 일부 서구 언론이 왜곡, 유포시키고 있는 거짓 선전에 현혹되지 말고 이슬람의 참모습에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카이로=이희정 기자
jay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