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악몽의 20년 恨풀려…"”악몽과 고통의 20년 세월 이었습니다. 그러나 진실과 조작은 반드시 가려질 것이라고 믿고 견뎌왔습니다.”
5공화국 군사독재 시절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이었던 이른바 ‘오송회(五松會)’사건.
1982년 평범한 교사에서 하루아침에 ‘빨갱이’로 몰려 옥살이까지 해야 했던 전성원(田成源ㆍ48ㆍ약사)씨 등 군산제일고 전ㆍ현직 교사 8명은 지난 16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됐다는 소식을 듣곤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피 눈물의 세월을 견디다 못해 숨을 거둔 이광웅(李光雄ㆍ92년 사망ㆍ당시 53세)씨의 해맑게 웃던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의 판정으로 명예를 되찾은 이들은 전씨와 조성용(趙成湧ㆍ65ㆍ동학혁명기념사업회 이사), 엄택수(嚴澤洙ㆍ50ㆍ시민운동가), 이옥렬(李鈺烈ㆍ49ㆍ이리공고), 채규구(蔡奎求ㆍ51ㆍ군산 진포중), 박정석(朴正石ㆍ59ㆍ서울 대명중), 강상기(姜庠基ㆍ55ㆍ진안 제일고)씨등 7명.
저 세상 사람이 된 이씨와 황윤태(51ㆍ사업)씨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판정은 다음 회의에서 심의될 예정이다.
이들에게 지난 20년은 고통과 좌절의 한맺힌 시간들이었다. 교직 박탈과 감옥살이가 가져온 경제적 궁핍도 버티기 어려웠지만, ‘빨갱이’라는 주위의 시선과 손가락질은 가족 모두에게 지울 수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들은 불행 중 다행으로 5공이 막을 내리던 88년2월 사면복권될 기회를 갖는다.
그나마 2명만 복직시키겠다는 당국의 ‘엄포’로 주모자로 몰려 고통이 가장 컸던 고 이광웅씨와 채규구씨가 교단에 다시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용공조작의벽은 높았다.
막노동까지 하며 생계를 유지했던 채교사는 “동료 교사들의 수근거림도참기 어려웠지만 교장이 대놓고 사표쓰고 나가라고 위협할 때는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광웅씨의 사연은 더욱 비극적이다. 복직 후 전교조활동으로다시 해직된 후 고문과 감옥생활의 고통이 가져 온 후유증으로 암선고를 받고 92년 세상을 떠났다.
또 99년 9월 교육부의 특별채용형식으로 나머지 동료들도 복직됐지만, 상당수는 동료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눈초리를 감당하기 힘들어 교단을 또 떠나야 했다.
당시 유일한 미혼이었던 전성원씨는 출소 후 1년정도 방황하다 우석대 약대에 편입, 전북 전주시에서 ‘전성원 종합약국’을 운영하는 등 유일하게 재기에 성공했다.
당시 명문고로 발돋움하려던 군산제일고는 이들 외에도 오송회 조작사건으로 김재규 교장이 물러나고 20여명의 교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등 만신창이가 됐다. 이들은 ‘제일회’를 만들어 한달에 한번 전주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한편 85년 ‘삼민투’ 위원장으로 미 문화원 점거농성의 주역이었던 함운경(咸雲炅)씨와 하영춘(한국경제신문 기자), 한승문(청호정보통신 대표)씨 등이 당시 증인으로 법정에 섰던‘오송회’ 교사들의 제자로 각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펴고 있다.
전주=최수학기자
shchoi@hk.co.kr
■오송회 사건
1982년 4월19일 전북 군산제일고 전ㆍ현직 교사들이 시국토론을 하고 김지하씨의 ‘오적’을 낭송한 모임을 공안당국이 이적단체로 간주, 국가보안법을 적용해 각각 징역 1~7년을 선고한 사건.
시인인 이광웅 교사가 평소 즐겨 읽던 월북시인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을 적어 둔 노트를 동교교사들에게 복사해준 것이 사건조작의 발단이 됐다.
한 학생이 이 노트를 빌려간뒤 버스에 두고 내린 것을 안내양이 경찰에 신고, 경찰은 같은 해 11월 이들을 불법 연행했다.
이후 한달여만인 12월8일 경찰은 ‘고교 교사 불온서적 탐독, 북괴방송 청취한 서클’을 적발했다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
조성용씨는 “‘오송회’라는 모임과 이름은 아예 없었다”며 “당국이 82년 4월 19일 교사 5명(五)이 학교 소나무(松) 아래서 4ㆍ19 위령제를 지낸 것을근거로 이 이름을 붙여 조작한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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