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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파리 講和會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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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파리 講和會議

입력
2002.0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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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월19일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국제회의가 파리의 프랑스 외무부 청사에서 시작됐다. 이것이 파리 강화회의다.그 해 5월까지 계속된 이 회의는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국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조지, 프랑스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가 주도했다.

파리 강화회의에는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의 출석이허가되지 않았고 약소국들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았다.

이 회의의 결과로 체결된 여러 강화조약을 뭉뚱그려 파리 강화조약이라고 하는데, 그 조약들은 구체적으로 독일에 대한 베르사유 조약(1919년 6월), 오스트리아에 대한 생제르맹 조약(1919년 9월), 불가리아에 대한 뇌유 조약(1919년11월), 헝가리에 대한 트리아농 조약(1920년 6월),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세브르 조약(1920년 8월)이다.

1919년 6월2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31개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맺어진 베르사유 조약은 파리 강화조약의 핵심이다.

그래서 제1차세계 대전 이후20년 가까운 기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440조로 이뤄진이 조약에 의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고, 알자스와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했으며, 유럽 영토를 삭감당했다.

이에 따라 독일의 면적은13% 줄었고, 인구도 10% 줄었다. 육군 병력은 10만 이내로 제한됐고, 해군의 군함 보유량도 10만톤 이내로 묶였으며, 공군과 잠수함의 보유가 금지되었다.

징병제도 폐지됐다. 또 라인강 좌안을 15년간 연합국이 점령하기로 했고, 독일의 지불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규모의 손해배상금이 부과됐다.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부과한 가혹한 조건들은 독일 국민을 절망에 빠뜨려 1930년대에 나치즘이 발호하는 자양분이 되기도 했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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