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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朴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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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朴烈

입력
2002.0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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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월17일 무정부주의 계열의 항일 운동가 박열이 평양에서 작고했다.향년 72세. 작고 당시 그의 직책은 평화통일촉진위원회 위원장이었다. 박열은 경북 문경출신이다. 어린 시절의 이름은 혁식(赫植) 또는 준식(準植)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고, 장년 이후의 삶은 북한에서 보냈다. 박열을 무려 22년3개월간 감옥에 가둔 것은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으로 일본 전역이 어수선하던 시절 터진 대역(大逆) 사건, 곧 일본 천황부자 폭살계획 사건이었다.

경성고보를 거쳐 도쿄로 유학을 간 박열은 무정부주의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를 조직하며 혁명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사상적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함께 1923년 9월 일본 황태자 결혼식에 참석하는 천황 및 황족, 내각 총리대신, 조선 총독 등을 한꺼번에 폭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폭탄을 구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동지 김중한(金重漢)을 보낸 직후 체포되었다.

박열과 가네코는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그 해 4월5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재판 당시 일본 검사의 문초를 받으면서도 두 사람이 서로 포옹하는 장면이 촬영돼 새나가 일본 정계와 사회에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가네코는 무기로 감형된 지 석달 남짓만인 1926년 7월23일 감옥에서 자결했는데, 유언에 따라 그녀의 유해는 박열의 고향인 문경에 안장됐다.

박열은 제2차세계 대전 종전 뒤인 1945년 10월17일 맥아더 사령관의 포고령에 의해 석방됐다.

박열은 일본에서 재일거류민단을 조직해 초대 단장을 맡았고, 1949년 4월에 영구 귀국했으나 이듬해 6ㆍ25동란 중에 납북됐다. 1989년 3ㆍ1절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고종석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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