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직장 동료들과 따끈한 우동 국물에 소주 한 잔. 2차 가기는 뭐하고 그냥 가기는 섭섭할 때. 심야 쇼핑이나 야근을 하고 배가 출출할 때.빌딩가나 주택가 골목길을 돌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포장마차. ‘한국형 선술집(Pub)’으로 불리며 서민과 애환을 함께 해왔다.
그렇지만 요즘의 포장마차는 예전 같지 않다.
월드컵을 앞둔 단속으로 숫자가 줄어들고 있고 손수레 포장마차가 소형 트럭과 결합해 기동성을 갖추게 되면서 고정된 포장마차촌이 생겨났다.
값도 웬만한 대중음식점과 맞먹는다. 그래도 간편하고 찾기 쉽고 낭만적 분위기가 있어 겨울밤에는 포장마차가 유혹한다.
서울 시내의 이색적인 포장마차촌을 둘러봤다.
▼'곱창’하면 동대문시장
두타, 밀리오레 상가와 도로를 두고 마주보고 있는 흥인시장 내 덕운상가 주변에 포장마차 60여 곳이 심야 쇼핑객들을 맞는다.
포장마차가 다닥다닥 늘어선 보도를 걷다 보면 곱창 굽는 냄새가 입맛을 자극한다. 이 곳 포장마차들이 한결같이 내걸고 있는 주 메뉴는 곱창.
돼지 곱창을 썰어 고추장 양념을 버무려 화덕판에서 조리해 팔고 있다.
이 곳 포장마차들은 시장 안에 자리잡고 있고 합법적으로 영업하기 때문에 전주집, 이모집 등의 상호를 내걸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심야에 인파가 몰리기 때문에 새벽 3시 넘어서까지 영업한다.
이 곳에서 일하는 상당수는 재중동포 여성들이다. 포장마차의 실제 주인인 한국인들이 월급여를 주고 포장마차 운영을 맡기고 있다.
임금도 싸고 이 곳을 자주 찾는 중국인 상인들을 불러 들이기가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호객을 하면서 “곱창 맛 좀 보고 가자우요”하는 옌볜식 억양은 명물이 되고 있다.
▼강남의 신종 포장마차
낮이면 주차장이나 카센터였던 자리에 밤에 텐트를 치고 영업하는 신종 포장마차가 생겨나고 있다. 낮에 손님들로 넘쳐나는 금싸라기 땅을 밤에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강남구 학동사거리 방주병원 옆 ‘노는 아이’, ‘패밀리’, 건너편의 ‘하자’, 서울은행 옆 ‘굿포차’는 낮에는 카센터나 주차장인 곳이다.
청담사거리쪽으로 올라가면 m.net 옆에있는 ‘부킹포장마차’는 낮에는 기사식당으로 쓰이는 곳.
‘노는 아이’의 이준호(48) 사장은 “포장마차향수를 간직한 30, 40대 샐러리맨은 물론이고 대로변을 달리던 신세대 오토바이족들이 생각난 김에 들르기도 한다”면서 “자정 무렵에 피크를 이루지만 새벽에도 유흥업소 종업원이나 연예계 종사자들의 발길이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 곳의 포장마차는 40~50평으로 공간이 넓고 우동, 국수, 삼결살 등의 메뉴에 소주를 끼워 팔고 있다.
▼전통 메뉴가 살아있는 종로
오후4시께부터 보신각 사거리부터 종로 3가 사이의 양쪽 대로변에 노점상과 포장마차가 하나둘씩 나타나며 저녁이면 행인이 걷기가 어려울 정도로 넘쳐난다.
이 곳은 포장마차의 발생지답게 1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포장마차 주인들이 적지 않아 전통의 포장마차 메뉴를 맛볼 수 있다.
포장마차는 1950년대 초반 청계천에서 윗부분만 광목천으로 가린 모습으로 참새구이에 잔 소주를 팔던 것이 시초로 알려져 있다.
종로세운상가 건물 주변의 포장마차 5~6개 업소가 그런 곳. 주황색 텐트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5평 가량의 포장마차에 들어가니 먹거리가 볼 만하다.
꼼장어, 닭똥집, 아나고, 해삼 같은 고전적인 메뉴와 더불어 자체 개발한 대합탕, 오징어 양념구이, 새우소금구이를 팔고 있다.
대합탕에는 대합, 새우, 버섯과 얇게 뽑은 우동 국수가 들어 있다. 이 업소 여주인은 “인근 청계천 시장에서 일하는 상인들이나 야근을 마친 샐러리맨들이 찾고 있고 먼 곳에서도 단골이 일부러 찾아온다”고 말했다.
▼신촌ㆍ영등포ㆍ인사동
종로구 인사동 공평아트센타 골목길과 계동 현대사옥 일대, 영등포구 심도림역 입구, 그리고 젊은이들이 몰리는 신촌 사거리 일대에도 포장마차들이 있다.
아파트 단지입구나 주택가의 빈터에도 산발적으로 영업하고 있다.
그렇지만 최근단속이 강화되면서 포장마차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서울의 대표적 포장마차촌이었던 방배동 포장마차촌은 2000년 12월 가로정비계획에 따라 철거되고 지금은 공영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서울 시내 2,000여곳 성업
포장마차는 우리 현대사의 굴곡에 따라 모습을 달리해 왔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장마차는 리어커를 개조해 나무로 덧대를 씌우고 광목천을 입혔다.
어묵 국물, 닭똥집, 꼼장어, 멍게, 해삼 등을 팔았다. 포장마차는 만들기 쉽다는 점 때문에 급속히 늘어 대도시의 변두리와 역 주변에 어김없이 들어섰다.
손님들은 나무로 얼기설기 만든 일자(一字) 의자에 참새처럼 앉아 술을 마셨다.
1980년대에는 경제성장에 발맞춰 30~50여 평 크기에 냉장고를 갖춘 ‘극장식 포장마차’가 등장했다.
고객층도 노동자, 회사원, 학생 등으로 다양해졌다. 그렇지만 포장마차는 88올림픽을 앞두고 거리 환경 조성이란 명목으로 급속히 줄었다.
1997년 IMF 사태가 터지면서 생계형 포장마차가 한 때 거리에 넘쳐나기도 했지만 최근 월드컵을 앞두고 다시 위축되고 있다.
요즘의 포장마차는 낭만적으로만 바라볼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서울 시내에서 목좋기로 소문난 자리는 권리금이 수천 만원 대를 호가해 돈이 있어야 포장마차 사장이 될 수 있다.
권리금이 오가다보니 포장마차의 장점으로 꼽히던 저렴함도 많이 사라졌다.
성인 3~4인이 닭똥집에 소주 2~3병을 시키면 2만~3만 원에 달해 실내 업소와 별반 차이가 없다.
포장마차는 양성화냐 철거냐를 놓고 논란이 되고 있는 상태. 서울시는 월드컵을 앞두고 포장마차가 도시미관과 주거환경, 보행권을 해친다는 이유로 단속에 나서고 있다.
최근 서울시는 조리하여 판매하는 식품과 그렇지 않은 식품을 구분하도록 하는 조례 개정안을 내놓았다.
이는 가로판매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포장마차와는 무관하다.
서울시측은 “포장마차는 원칙적으로 불법이어서 상시적으로 단속해야 하지만 인력이 부족하고 상인들이 조직화돼 있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포장마차가 늘고 있다. 동대문시장의 포장마차는 시장내에서 정상 영업하고 강남 일대의 신종 포장마차들도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영업하고 있다.
전국노점상연합회가 추정하는 서울시내 포장마차 숫자는 현재 2,000여 개. IMF 직후 4,000여개가 성업했던 것에 비하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창업컨설팅전문 스타트비즈니스(www.startok.co.kr)의 김상훈 컨설턴트는 “비위생이 문제라면 미국 노점상처럼 포장마차에 수도가 연결되도록 조치하는 방법이 있다”면서 “무조건 단속만 할 것이 아니라 포장마차를 양성화해 문화상품으로 개발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민주기자
mj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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