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이용해 잠시 프랑스에 와 있다.유럽에서 맞는 2002년 새해의 가장 큰 변화는 유럽연합 12개 국가에서 유로화가 정식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월 1일 새벽 각국 은행은현금자동인출기를 통해 일제히 유로화 공급을 개시했다.
정부 내 이견으로 시끄러운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일주일이 지난 지금 대부분 나라에서 유로화로의통화 이행은 별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
유로화만큼의 눈에 보이는 큰 변화는 아니었지만 프랑스에서는 1월 1일 작고도 의미심장한 또 하나의 제도 변화가 있었다.
지난 달 하원에서 승인된 ‘아버지 출산휴가법’의 시행이다.
이제 프랑스의 모든 아버지들은 자녀를 낳으면 4개월 안에 2주간의 100% 유급휴가를 신청할 수 있게 됐다.
아버지 출산 휴가제는 현재 어머니에게 적용되고 있는 유급휴가제를 보조하는 성격이 짙다.
그동안 프랑스여성은 아이를 낳으면 둘째아이까지는 16주, 셋째아이부터는 26주의 유급휴가를 받았지만 아버지는 ‘가족연대휴가’라는 명목으로 3일의 휴가만을 받아왔다.
프랑스가 유럽에서 아버지 출산 휴가제를 최초로 시행하는 나라는 아니다. 이미 북유럽에서는 꽤 오래 전부터 이 제도를 도입해 현재 스웨덴과 핀란드는 각각 40일과 18일의 아버지 휴가를, 덴마크는 프랑스와 같은 2주의 출산 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프랑스와 한국이라는 두 나라를 모두 경험해 본 나는 프랑스의 아버지 출산 휴가제 도입을 보며 두 나라가 ‘가족’에 과연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언뜻 보기에는 한국사회가 ‘가족’에 훨씬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이의 탄생을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지켜보도록 보장해 준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사회가 가족의 소중함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징표가 아닐까.
아버지 출산 휴가제를 적용하고 있는 프랑스가 오히려 가족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고 있는 나라가 아닐까.
물론 가족 성원 간의 강한 유대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문화적 특성 중의 하나다.
이 끈끈한 혈육간의 정이 바로 한국의 가족을 사회ㆍ경제 분야에서의 기본 단위이면서 동시에 핵심적인 단위로 기능하게 하고 있다.
수 많은 경제논문들이 한국의 자본주의를 '가족적 자본주의'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가족적 가치에 대한지지는 간혹 모순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한국에는 아버지 출산 휴가만 없는 것이 아니다. 2000년 노동부가 1,740개 기업의 고용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 기업인 중 고작 21%만이 여성 출산 휴가를 제대로 주고 있다고 응답했다.
특히 중소기업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아예 출산 휴가를 무시하거나 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무급휴가로 전환하고 있었다.
몇몇 기업은 아예 '가족의 가치'의 존재 자체를 깡그리 무시하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기업의 이윤획득에 도움이 되는 경우라면 가족적 가치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강조하다가도 출산 휴가기간연장이나, 중소규모 사업장을 포함한 전면적 출산 휴가 보장제도의 도입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의사 표시를 한다.
때로 임신한 여성에게 가정에서 어머니 역할이나 잘 하라며 강제로 해고하기도 한다.
이런 기업인들이 즐겨 인용해 왔던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의 자서전 문구가 있다.
누군가 자신에게 아내와 아이들 등 가족과 회사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하겠냐고 묻는다면 자기는 망설임 없이 회사를 택하겠다고 답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대우그룹은 결국 부도를 맞았다. 가족을 포기했던 김 전 회장은 이제 더 이상 회사도 택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에릭 비데 프랑스인 홍익대 불문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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