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중은행이 서울에서 3일부터 이색 전시행사를 열고 있다. 제목부터 흥미로운 '세계 진귀저금통 전시회'.젖가슴 형태의 3세기 로마 저금통부터 미국 캔자스주의 한센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고안됐다는 돼지저금통의 원조까지,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희귀 저금통들이 고객의 발길을 붙잡고있다.
'근검절약과 저축의식의 함양'을 위해 마련했다는 이 행사를 보면서 씁쓸한 아이러니가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요즘 은행의 영업행태를 가만히 보면 정말 은행들이 저축을 장려하는 것인지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수익성'이 지상명제로 등장하면서 각 은행 지점 인력은 외환위기 전보다 5분의 1로 줄었고 잔돈 교환만 전담하는 '출납계'도 사라진 지 오래다.
인력소모와 처리비용이 많은 업무는 자연히 뒷전으로 밀리고, 동전교환 수수료나 소액계좌 유지비따위의 전에 없던 제도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어린 아이가 동전으로 잔뜩 배가 부른 돼지저금통을 들고 창구에 왔다고 하자.
그렇지 않아도 번호표를 받고 대기중인 고객들이 수십 명인데 다른 업무를 팽개친 채 저금통과 씨름을 할까.
한 은행 직원은 "냉정히 돌려보낼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토로한다.
치열한 생존경쟁의 시대에 은행들이 선택한 '수익성경영'이 내핍과 근검절약의 상징이던 돼지저금통을 귀찮은 천덕꾸러기 정도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 같은 불황기에는 저축보다는 소비가 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는 논리가 힘을 얻고 있는 현상도 돼지저금통의 존재를 초라하게 한다.
이러다 앞으론정말 전시회나 박물관에서나 돼지저금통을 구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변형섭 경제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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