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트마 간디/요게시 차다 지음 / 정영목 옮김1948년 11월 8일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의 암살범 나투람 고드세가 법정에 섰다.
밤마다 엄청난 분량의 진술서를 작성해 온 그는 이날 다섯 시간에 걸쳐 최후 변론을 했다.
“나는 간디가 그의 의무를 이행하는 데 실패했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그는 파키스탄의 아버지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의 영적인 힘과 그렇게 거창해 보이던 비폭력주의는 모두 무너졌으며 그 무력함이 드러났습니다…”
민족의 분할을 애통해 하면서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합을 진정으로 소망했지만, 간디는 같은 민족에게 죽음을 당했다.
암살범은 간디의 친이슬람 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힌두교도였다.
수많은 ‘간디 평전’이 있다. 간디 자신이 자서전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왜 다시 간디인가. 평전 ‘마하트마 간디(Rediscovering Gandhi)’를 쓴 인도인 요게시 차다(68)는 이렇게 말한다. “간디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사랑이 인류에 대한 사랑과 반드시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그는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불의, 노예제, 궁핍이라는 족쇄로부터 해방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인류의 장래를 두고 괴로워했다.”
세기가 바뀌었지만 세계 곳곳은 여전한 억압으로 신음한다. 고통받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비폭력을 택한 간디의 메시지는 아직까지도 유효하다.
그리고 “비폭력이라는 좁고 곧은 길 외에는 희망이 없다.”
차다는 간디를 둘러싼 신화로부터 간디라는 인간을 되찾는 작업에 몰두했다.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소심한 어린 간디가 영국에서의 유학생활 뒤 변호사로 자리잡기까지,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비폭력 저항주의’를 내세우면서 자유를 쟁취하기까지, 인도 근대 정치사의 혼란 속에서 그가 국민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거듭나기까지 세심하고 꼼꼼하게 삶을 좇는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수줍은 남자는 영국의 식민 지배에 맞서 자립과 자존을 외쳤다.
이 남자의 무기는 ‘경찰을 막기 위해 손을 들어서도 안 된다는’ 비폭력의 신념이었다.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가 격렬하게 반목하는 중에도 그는 두려움 없이 빈 손으로 걸어 들어가 민족의 화합을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열 세 살에 결혼한 그는 평생을 육욕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 살았다.
아내가 죽은 뒤에도 그는 ‘정열의 완전한 극복’에 이르지 못해 괴로워했고, 금욕의 실험을 위해 증소녀 마누에게 잠자리를 같이 하자고 했다.
당연하게도 큰 추문이 되었고 간디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전기 작가인 차다는 간디 암살범의 재판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이것은 차다의 ‘마하트마 간디’를 여느 평전과 구별짓는 부분이다.
“나는 그 정책과 행동을 통해 수백만 힌두교도에게 고통과 파멸과 파괴를 안겨준 사람을 쏘았습니다.”
그러나 간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진리를 관철하고자 하는 그 노력으로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어쩌면 평생동안 진리를 증명하는 데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러나 ‘진리는 곧을 때는 금강석 같으면서도 연할 때는 꽃 같은 것’이라고 한다.
간디의 비폭력은 금강석 같이 빛나고 꽃 같이 아름다운 진리가 되어 인류가 가야 할 길의 안내자가 되어준다.
김지영기자
kimj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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