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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희곡 당선작 - 페르소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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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희곡 당선작 - 페르소나(2)

입력
2002.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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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루드(어둠속에서 밝은 분위기의 실내악이 흐른다. 조명이 밝아오면 무대 전면 가운데의 테이블에서 연출가와 ‘죽음’이 체스를 두고 있다. 무대 후면에 책상이놓여 있고, 그 위에 원고뭉치와 타이프라이터가 보인다. 무대 후면 벽에 ‘죽음의 가면’이 걸려 있다. 체스게임의 양상은 ‘죽음’의 일방적인 우세로드러난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동안 연출가의 체스 말은 다 잡히고 세 개만 남게 된다. 초조한 듯 담배를 꺼내 입에 무는 연출가)

죽음: 담배는 몸에 안 좋은데.

연출가: 그런 건 네가 걱정 안 해도 돼.

죽음: (연출가의 체스 말을 잡으며) 결론이 뻔한 승부는 재미가 없어.

연출가: 아직은 알 수 없어. 모든 게임은 끝까지 가봐야 아는 거야.

죽음: 서툰 솜씨로 꾸며낸 이야기는 처음 몇 글자만 읽어봐도 끝이 다 보이는 법이지. 연극도 마찬가지야.

연출가: 글쎄. 네가 여태 좋은 연극을 못 봐서 그런 가본데, 끝이 좋은 연극이 진짜 좋은 연극이야. 처음엔 황당하고,갈수록 구질구질해도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야. 그러니 끝까지 가보는 게 중요하지.

죽음: 하긴, 인생도 끝이 중요하지. 그런데도 눈앞에 다가온 자신의 결말을 못 본 척하며 끝없이 고집을 부리는 건 정말안타까운 결말이야.(연출가의 체스 말을 또 하나 잡는다)

연출가: 서두르지마. 끝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끝에서부터 시작할 순 없잖아. 일단 끝까지 갔다하더라도, 끝은 여전히안 나타나. 끝은 끝까지 기다려봐야 끝나게 되어 있어.

죽음: (다시 체스게임에 집중하며) 이제 왕 주위엔 사제와 광대 밖에 안 남았어.

연출가: 그거면 충분해.

죽음: 정말 사제와 광대가 왕을 지켜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연출가,체스 판을 열심히 보다가 문득 자리에서 일어난다)

연출가: 잠깐. 그건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 나에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생각할 시간 말이야.

(연출가는 생각에 잠긴 척하면서서성거리다가 무대 후면의 책상으로 가 앉는다.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린다)

죽음: 또다시 승부를 미룰 생각이로군. 이건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미룬다고 미뤄지지도 않을 거고.

연출가: (타이핑을 하며) 너하고 승부를 내기 전에 난 아직 할 일이 많아.

죽음: 그 형편없는 짓거리.

연출가: 몰래 훔쳐본 주제에.

죽음: (혼자 체스를 두며) 원래 훔쳐보는 게 제 맛이야. 이제 그만 패배를 인정하는 게 어때?

연출가: (딴청을 피우며)다시 써야 해. 왕의 반응이 너무 약해. 광대도 좀더 과장되게 표현해야 되고, 사제도 너무 밋밋해.

죽음: (연출가에 다가가) 태연한 척 하지마. 내가 두렵지?

연출가: 어쨌든 연습할 때는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 솔직히 아까도 방해가 됐어.

죽음: (양손으로 연출가의 어깨를 강하게 짚으며) 때가 됐어. 어서 가자. 어서.

연출가: (뿌리치며)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잖아.

죽음: 이미 승부는 결정 났어.

연출가:아직은 아냐. 연극은 계속 진행되어야 해. 그리고 대본도 수정될 거야. 지금 이렇게 고치고 있는 게 안보여?

죽음: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는 걸.

연출가: 난 이번 작품에 내 삶과 죽음까지 포함한 모든 걸 쏟고 있어. 비록 한순간일지라도 무대 위에서 영원히 살아 숨쉬는영혼과 육체를 느끼고 있다구.

죽음: (대본을 읽어보다가 자그맣게 비웃으며) 미친 놈. 이건 아무래도 머리가 모자란 예술가의 완벽한 넌센스야. 넌 자질이없어.

연출가: 난 할 수 있어.

(무대전면의 체스 판으로 다가오는 연출가. 자신의 체스 말을 이리저리 움직여본다. ‘죽음’은 여전히 무대 후면의 책상에 앉아 대본을 뒤적인다)

연출가: 방법이…방법이 있을 거야.

죽음: 광대와 사제만으로는 불가능해. 어림도 없지. 지금이라도 패배를 인정하고 날 따라와.

연출가: 날 어디로 데려갈 셈이지?

죽음: 광대의 재주로도 피할 수 없고, 사제의 기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시간도없고 공간도 없고, 빛도 없고 어둠도 없고, 소리도 없고 형체도 없는 새로운 세계.

연출가: 결국 거기엔 아무 것도 없단 말이군. 연극도 없겠어.

죽음: 굳이 그런 걸 할 필요가 없지. 시작도 끝도 없는 세계에서 연극이 왜 필요하겠어?

(긴침묵. 사이)

연출가: (체스 말을 신중하게 옮기며) 그런데, 왜 하필, 내가 널 따라 가야 하지?

(읽던대본을 들고 체스 판으로 다가오는 ‘죽음’. 체스 판의 변화를 주시한다)

죽음: (체스 말을 신중하게 옮기며) 그게, 무슨, 뜻이야?

연출가: (따지듯이) 왜 하필 나야? 수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내가 가야하지?

죽음: 아하, 그런 질문은 일단 성립하질 않아.

연출가: 왜?

죽음: 수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넌 왜 하필, 그렇게 생겨먹은 인간으로, 여기 이 모양 이 꼬락서니로 앉아 있는 거지?넌 왜 하필 수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서 꼭 너 같은 인간이 된 거지? 왜 하필? 이거, 대답할 수 있어?

연출가: 이건 그거랑 차원이 다른 문제야.

죽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정답이야. 알겠어?

연출가: 모르겠어. 난 그 이유를 알아야겠어. 왜 하필 내가 널 따라 가야 하지?

죽음: 굳이 말하자면, 네가 날 불렀으니까.

연출가: (놀라며) 뭐라고?

죽음: 네가 먼저 날 불렀다고.

연출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니야, 난 그런 적 없어!

죽음: (능청스럽게) 정말이야. 난 네가 불러서 온 거라구!

연출가: (흥분하며) 난 너 같은 건 부른 적 없어! 아무도 부른 적이 없다구! 어서 꺼져! 그만 괴롭히고, 꺼져 버리란말이야!

(연출가는‘죽음’을 저주하며, 무대 후면의 책상으로 돌아간다. 그곳엔 어느새, 배우1,2가 서 있다. 두 배우의 눈에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은태연하게 연출가의 대본을 읽고 있다)

배우1: (무안한 듯) 형, 우리 나중에 다시 올게.(나가려 한다)

연출가: 언제 왔어? 너희들한테 한 얘기 아냐.

배우2: 형,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아무래도 좀 쉬어야 할 거 같은데.

연출가: (타이핑을 하며) 이거만 마무리하면 돼. 왜? 할 말 있어?

배우1: 아니. 그게 말이야…

연출가: 할 말 있으면 해.

배우2: 그게 아니라, 대본 말인데…

연출가: 말해보라니까.

배우1: 관객들이 이해해줄까? 죽음이라는 존재가 무대에 직접 등장한다는 게 말이야… 또 왕이 죽음을 피해 가는 과정이 좀어딘가…

연출가: 대본 얘기구나. 그건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죽음: 워낙 엉성하니까. 이 친구들이 너보다 더 똑똑하다.

연출가: (죽음을 쳐다보고는) 네가 참견할 문제가 아니야.

배우1: 그건 나도 알지만 그래도…

연출가:(배우1에게) 아니. 나도 문제가 있다는 거 알아. 고치면 괜찮아질 거야. 걱정 마.

배우2: 그리고 또 내 생각인데…광대나 사제의 캐릭터가 말이야.

죽음: 너무 평범하지? 재미도 없고, 한 마디로 개성이 없다 이 말이지.

배우2: 개성이 없어.

죽음: 난 보는 눈이 역시 정확해.

연출가: (화를 내며) 알아! 안다구!

배우2: 왜 그래? 그렇다고 이렇게 화낼 것까지는 없잖아?

연출가: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래?

배우1: 형, 이래 가지고는 연습도 제대로 될 턱이 없어. 대본도 아직 제대로 안 되어 있고, 내용도 배우들이 공감하기힘든 데다가…

연출가: 그런데다가?

배우2: 형이 연기까지 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연출이 배우까지 한다는 건…

죽음: 모든 게 문제투성이야. 문제야, 문제.

연출가: (죽음에게) 해결할 거라니까. 내가 풀어낼 거라구.

배우1: 어디 보고 얘기하는 거야?

배우2: 거기 누가 있어?

연출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알아. 나도 다 안다구. 제발 조금만 이해를 해 줘. 너희들이니까 하는 얘긴데, 이번작품 좀 도와 줘. 나도 이렇게 서두르고 싶지 않아.

배우1: 그래.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야. 왜 이렇게 일을 순리대로 못 풀어 나가냐고. 연출이 배우까지 해가면서대본도 쓰고…

죽음: 능력은 안되고 고집만 남아있지.

연출가: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죽음에게)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네가 재촉 하는 바람에…

배우1: 무슨 말이야? 내가 언제 그랬어? 형, 이제 보니 좀 이상하다. 왜 나한테 뒤집어씌우는 거야?

죽음: 일종의 책임회피라고나 할까.

연출가: (일어서며) 나 좀 쉴게. 미안하다. 내일 얘기하자.

배우1: 알았어.

배우2: 우리 먼저 갈게.

(배우1, 2 나간다. 연출가의 고뇌에 찬 한숨. ‘죽음’은 원고를 들고 연출가에게 다가가 약올리듯 중얼거린다)

죽음: (대사 읽듯이) “내가 왔어. 내가 널 찾아 왔어. 까만 망토를 입고, 얼굴엔 하얀 분칠을 하고.”

연출가: 미치겠군.

죽음: (여전히) “가자, 어서, 일어나. 이젠 정말, 가야 해.”

연출가: 입 좀 다물 수 없어?

죽음: (여전히) “다시 오겠어. 그때까지 준비를 해 둬.” 이거 참, 웬만큼 고쳐서는 어림도 없겠어. 차라리 새로 써라.

(‘죽음’은연출가의 대본을 아무렇게나 던져 버리고는 무대 후면 벽에 걸린 ‘죽음의 가면’에 다가가 손으로 입맞추는 시늉을 한다)

연출가: 제발, 다시는 나타나지 마!

죽음: (웃으며) 네가 날 불렀다니까. (나간다)

(연출가의복잡한 심경을 반영하듯 다양한 현악기의 ‘음계가 맞지 않는’ 소음이 들려온다. 조명, 서서히 어두워지고, 벽에 걸린 ‘죽음의 가면’만 밝게 빛난다)

(고통스러워하는 연출가, 가면을 떼어내 바닥에 집어 던지려 한다. 순간, 동작을 멈추고 다시 가면을 유심히 바라본다. 소녀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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