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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희곡 당선작 - 페르소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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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국일보 신춘문예 / 희곡 당선작 - 페르소나(3)

입력
2002.01.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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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 Ⅱ: 극중 극 ‘춤추는 죽음’(부분조명이들어오면, ‘죽음’이 테이블에 앉아 체스 판을 주시하고 있다. 사제와 광대의 체스 말을 두 손에 집어들고, 마치 인형놀이를 하듯 가지고 논다.‘죽음’의 인형놀이에 맞추어, 어둠 속에서 사제와 광대의 목소리만 들린다)

사제: 지금 온 나라 안팎에 해괴한 헛소문이 떠돌고 있어.

광대: 헛소문이라뇨?

사제: 국왕이 까만 망토를 입은 유령한테 홀려 다닌다는 거야.

광대: 그건 헛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네요.

(조명이밝아오면, 사제와 광대의 모습이 드러난다. ‘죽음’의 인형놀이는 계속된다)

사제: 이게 다 신앙심이 부족해서 생긴 일이야. 천사의 눈에는 유령이 보일 리가 없다구.

광대: 아무래도 전 악만가 봐요. 저한테는 매일 유령이 눈에 보이거든요.

(순간,‘죽음’은 광대와 사제에게 다가간다. 광대의 얼굴에 대고 손짓을 하며 자신이 보이는지 확인해본다. 광대와 사제는 여전히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제: 이러다가 국왕이 바뀌면, 우리까지 화를 입을지도 몰라. 조금만 더 버티면, 대주교 자리가 눈앞에 보이는데…

광대: 아, 또다시 길고 긴 유랑생활이 시작되는구나. 그동안 정들었던 궁정 광대 생활도 막을 내리고 있어. 애꿎은 광대의운명이여.

사제: 하루 빨리 국왕을 괴롭히는 그놈의 유령을 쫓아버려야겠어.

광대: 과연 쫓아낸다고 쫓겨날까요? 한 성깔 하겠던데.

죽음: 당연하지.

사제: 나한테 방법이 있어.

(사제는미리 준비한 ‘죽음의 가면’을 꺼낸다)

광대: 이게 뭔가요?

사제: (웃으며) 하늘 나라 천사가 보낸 선물이지.

광대: (가면을 보며) 생긴 모양새가 그쪽이랑은 영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광대가가면을 써본다. 사제는 광대에게 귓속말을 중얼거린다. 뭔가 음모를 꾸미는 눈치다. ‘죽음’ 또한 의아한 듯 연출가의 대본을 뒤적인다)

죽음: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런 장면은 대본에 없었는데.

(의관을갖춘 왕이 종을 울리면서 등장한다. 사제가 왕을 맞이한다. ‘죽음’은 광대의 그네에 앉아서 대본을 뒤적인다)

사제: 폐하, 밤새 편안히 주무셨는지요.

왕: 아니. 벌써 며칠짼지 몰라. 꿈자리가 하도 뒤숭숭해서 감히 잠들 생각도 못해.(광대가 쓴 가면을 목격하고는 놀란다)으악, 당장 저리 가지 못해! 이젠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서 나를 괴롭히는구나.

광대: (가면을 벗으며) 폐하, 접니다. 놀라셨습니까?

왕: 휴, 난 또 누구라고. 그런데 이 가면은 어디서 난 건가?

사제: 이 가면이 온 나라 전체에 떠들썩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애 어른 할 거 없이 밤이면 밤마다 이 가면을 쓰고 거리를돌아다니는 게 유행이랍니다.

왕: 뭐라고?

광대: 까만 망토를 입고, 얼굴엔 하얀 분칠을 하고, 등뒤에 숨어서, 갈 길을 재촉한답니다.

왕: 도대체 누가 이런 해괴한 짓을 한단 말이야?

사제: 아무래도 폐하를 괴롭히는 유령이 이 가면을 만들어 널리 퍼뜨리는 게 아닐까요?

왕: 안되겠어. 온 나라에 퍼져 있는 이 괴상한 가면을 모조리 압수해서 불태워버려! 그리고 이걸 만들어낸 자를 당장잡아와!

죽음: (대본을 뒤적이며) 흠, 언제 고쳤지? 처음 보는 내용인 걸.

광대: 누군지 모르지만 된통 걸렸네요.

사제: 당장 잡아오겠습니다, 폐하.

광대: (사제에게) 그런데 누굴 잡아올 겁니까?

(사제는‘죽음’이 앉아 있는 그네가 조금씩 흔들리는 것을 주시하느라 자신의 대사를 놓치고 있다. 극중 극이 깨진다)

광대: 대체 누굴 잡아올 거냐고요?

사제: (혼잣말로) 이상하다.

왕: 뭐해? 사제가 대답을 해야지?

(그네로다가가는 사제. ‘죽음’이 대본을 읽으며 그네를 조금씩 흔든다)

사제: 아까부터 이 그네가 자꾸 움직이는 거 같아. 봐, 아무도 없는데.

광대: 내가 너무 심하게 탔나?

왕: (죽음을 노려보며) 너,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올 거야?

사제: 나? 지금 나보고 하는 얘기야?

죽음: 미안해. 방해가 되었다면.

(‘죽음’이그네에서 일어난다. 왕(연출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지나쳐간다. 광대가 흔들리는 그네를 붙잡는다)

죽음: (마치 연기를 하듯) 폐하. 이런다고 목숨이 부지될 수 있을 거 같습니까? 갈 사람은 가야만 합니다. 떠날 사람은떠나야만 한다구요.

왕: (죽음에게)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죽음: 열심히 해 봐. 어디 쓸 만한지 봐줄 테니까.(나간다)

사제: (영문을 모른 채) 연출. 미안해요. 나 때문에 끊어져서.

광대: 그럴 수도 있지 뭐, 오늘 새로 받은 대본인데. 그런데, 앞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 거야? 이거 참, 연습을할수록 모르겠네.

(왕은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나머지 배우들도 영문을 모른 채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조명, 서서히 어두워진다)

■소녀를 위한 리허설

(조명이들어오면, 소녀가 ‘죽음의 가면’ 아래에 앉아 있다. 연출가가 소녀에게 대본을 건넨다)

소녀: 이게 뭔가요?

연출가: 수정이 끝난 완벽한 대본이야. 네가 만들어준 저 가면 덕분인지 작품이 손쉽게 써지더군.

소녀: 그런데, 이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거죠?

연출가: 며칠 고민하다가 생각을 바꿨어. 아무래도 이번 작품엔 이 박제 같은 가면보다는 살아 있는 배우가 필요한 게 틀림없어.특히, 너처럼 연출의 생각을 완벽하게 읽어낼 줄 아는 배우라면 더욱 좋겠고.

소녀: (기뻐하며) 그럼, 저도 무대에 설 수 있는 건가요?

연출가: 물론이지. 드디어 기회가 온 거야. 가면이 아니라 너 자신의 얼굴로 당당하게 무대에 설 수 있다고.

소녀: 고맙습니다, 선생님. 그런데 제가 맡을 역이 뭔가요?

연출가: 소녀 역이야.

소녀: (대본을 뒤적이며) 소녀…소녀라… 어머나, 이렇게 대사가 많아요? 이걸 제가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연출가: 넌 할 수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온다면. 저기 무대 가운데로 가 보겠어?

소녀: 네.

(소녀는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대본을 뒤적인다. 호흡을 가다듬고 발성연습을 하는 등 긴장하는 모습이다. 연출가는 그동안 벽에 걸린 ‘죽음의 가면’을떼어 자신이 직접 쓴다. 조명 점차 흐릿해지며, 부분조명이 소녀에게 집중된다. 가면을 쓴 연출가는 소녀 주위를 서성이며, ‘죽음’ 역을 대신한다.긴장과 불안으로 가득한 소녀의 심리를 반영하듯 현악기의 단조로운 리듬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된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대본을 더듬더듬 읽는 소녀는‘죽음의 가면’ 앞에서 점차 최면상태에 빠진다)

연출가: 시작해, 어서.

소녀: (대본을 읽으며) 까만 망토를 입고, 하얀 얼굴을 가린 채, 등뒤에 숨어서, 갈 길을 재촉하는, 까만 망토를 입고,하얀 얼굴을 가린 채, 등뒤에 숨어서, 갈 길을 재촉하는…

연출가: 가야 할 시간이야, 어서, 서둘러야 해.

소녀: 그가 왔어요. 그가. 까만 망토를 펄럭이며, 발자국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함께 가자고 재촉해요.

(‘죽음’이천천히 등장한다. 무대 후면에 서서 연출가와 소녀를 유심히 관찰한다)

연출가: 그를 따라 가보고 싶어?

소녀: 난 알고 있어요. 그를 따라 가도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말이죠.

연출가: 어떻게 알지?

소녀: 난 두렵지 않아요. 내 영혼이 내 몸을 떠나는 순간, 약간의 휴식을 취하고, 그 휴식에 익숙해질 무렵엔 새로운일들이 벌어질 거에요. 이 세계에서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새로운 일들이…

연출가: 그게 어떤 일이야?

소녀: 말할 수 없어요. 상상할 수도 없는데,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어요?

(소녀는어느새 대본 없이 연출가에게 곧바로 말하고 있다. 연출가는 소녀의 손에서 대본을 자연스럽게 거둬들인다)

연출가: 이제 눈을 감아 봐.

(소녀는눈을 감는다. 연출가는 가면을 쓴 얼굴을 소녀에게 빠싹 붙인다)

연출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소녀: 그게 뭔가요?

연출가: 죽음이 직접 널 찾아온다면, 그 사실을 믿을 수 있겠니?

소녀: (눈을 감은 채,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연출가: 아니, 마음 속으로 그려봐. 까만 망토를 입고 하얗게 분칠한 얼굴로 네 옆에서 서성인다면… 아니, 옆이 아니라,바로 뒤에서.

소녀: (눈을 감은 채 힘겹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아요.

연출가: 그래. 넌 분명히 본 적이 있을 거야.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어.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는 어두운 무대 위에서우리를 기다리고 있고,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객석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연극이 끝나면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우리를 데리고 갈 거야.

죽음: 잠깐. (나오며) 얜 누구야?

연출가: 쉿! 조용히. (죽음을 한쪽 구석으로 데리고 간다) 바로 얘가 널 불러 냈어. (가면을 벗으며) 이 가면을 만들어처음 내게 보여 줬지. 지금부터 내 작품에서 새로운 역을 맡게 될 거야.

죽음: 새로운 역? 그새 많이 뜯어 고쳤나 보군.

연출가: (대본을 보여주며) 물론이지. 이 작품은 역사에 길이 남을 최고의 작품이 될 거야. 인생은 짧지만, 예술은 무진장길거든.

죽음: (대본을 뒤적이며) 그건 옛말이지. 요즘은 안 그래. 인생은 짧고…, 예술은 더 짧아. 그냥 순식간이야. 너 같은자칭 예술가들은 재활용이 전혀 안 되는 망각의 폐기물들을 만드느라 그 짧은 인생조차 금새 다 써버리고 말지. 안타까워라.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는게 최곤데.

연출가: 그래. 침묵. 곧 연극을 시작해야 되니까, 네가 좋아하는 침묵이나 지키고 있으라고.

(연출가는급히 퇴장한다. 현악기의 단조로운 리듬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된다. 조명, 급격히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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