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운동가 백용성 스님(1864-1940)은 올해 임오년에 관해 예언적 유훈을 남겼다.일제 암흑기 불교 혁신과 민족 중흥의 큰 뜻을 펴고 독립선언 33인 대표로 참여한 스님은 1999년부터 몇 년간, 특히 2002년이 우리 국운이 갈리는 해가 될 것으로 내다보았다고 한다.
세계적 강대국에 종속되느냐, 아니면 스스로 주인 행세하는 나라 되느냐의 기로에서 장구한 국운을 잘 이어 받으라는 가르침을 후세에 남겼다.
국운이 쇠잔한 시절, 먼 앞일까지 헤아린 뜻이 놀랍다.
물론 분단 상태에서 월드컵을 주최할 만큼 성장한, 21세기 초 나라의 처지와 위상을 정확히 예견했다고는 믿기 어렵다.
그러나 세상 이치를 깨친 혜안으로 민족사의 중대 갈림길을 내다본 유훈일 수 있다.
안으로는 진정한 새시대를 열 지도자를 뽑아야 하고, 밖으로는 척박한 정세 속에 나라의 진로를 지혜롭게 선택하는 과제가 어느 때보다 절박한 때문이다.
올 대통령 선거는 우리 사회를 치열한 갈등 속으로 몰고 갈 것이다.
지금 정권에서 오히려 후퇴한 지역과 계층간 화합이 파탄에 이르고, 보수와 진보의 첨예한 이념 대결은 사회를 찢어 놓을 수 있다.
경제 회복 등의 국가적 과제는 뒷전에 밀린 채, 과거의 유산이 사회를 짓누를 것이 걱정된다.
남북 관계와 주변 정세도 미국의 강경한 안보 논리에 지배돼 악화할 전망이다.
대 테러 전쟁 소용돌이 속에 북한을 다시 격리한 채 불안한 풍요에 자족한 냉전적 상황으로 되돌아갈 것이 우려된다.
그 억센 질곡을 내심 반기는 보수 세력이 미국을 업고 득세한다면, 민족의 장래를 주도적으로 개척하자던 국민적 합의는 한갓 역사의 에피소드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새해에는 덕담을 하는 게 도리다.
행복과 평화의 소망으로 가득한 나라 안팎 지도자들의 신년사는 경제 회복 전망과 월드컵 열기와 더불어 오랜 시름을 잊게 할 정도다.
그게 덕담의 미덕이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큰 지도자 부시 미국 대통령은 이런 미덕을 비웃듯이 새해도 전쟁의 해가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테러를 뿌리뽑는 전쟁을 어디서든 계속하겠다는 다짐이다.
미국인들은 위안과 고무(鼓舞)를 느낄 것이나, 세상이 조용해야 그나마 호구지책에 전념할 힘없는 나라와 약한 이들에게는 불길한 새해 메시지다.
흔한 덕담보다 낡은 유훈 얘기를 꺼낸 것도 그 때문이다.
어차피 미국에 명운을 건처지에 복잡한 선택을 고민할 게 있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수굿하게 경제나 살리고 나라의 방비만 튼튼히 하면 될 것이란 논리다.
이 사회 보수세력은 이미 그게 최선의 국가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그래서는 한 세기 전 선각자가 국제 정세를 내다본 안목에도 미치지 못한다.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은 명분과 무관하게 21 세기 세계 질서 주도력을 굳히려는 제국주의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나라 안팎에서 보수 이념을 실현하고, 도전하는 세력과 변화의 흐름을 통제하려는 시도라는 지적이다.
냉전 이후 흐트러진 국론을 결집하고, 하나가 된 유럽과 회생하는 러시아와 도약하는 중국 등으로 국제 질서가 다극화하는 변화를 통제하려 한다는 것이다.
테러에 대한 공분을 앞세운 미국의 위세에 세계는 자세를 낮춘 형국이다.
이런 마당에 일본의 괴선박 격침이 예고한 대 북한 압박이 주변 정세를 냉동시켜도, 우리에게 자주적 운신의 여지는 없는 것으로 지레 체념할 수 있다.
그러나 기세 등등한 부시의 보수 드라이브도 머잖아 안팎의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고양된 여론을 의식해 엎드린 민주당과 진보 세력은 올 의회 선거에서 대세반전을 꾀할 것이고, 중국과 러시아와 유럽이 뒤따를 것이다.
그렇게 세상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할 것이란 진단이 이미 나오고 있다.
대 테러 전쟁이 세계사의 긴 흐름을 좌우할 수는 없다. 이런 이치를 잊은 채 우리의 국운을 국제 정치의 피상적 변화에 내맡기는 것은 어리석다.
올 해 우리는 스스로 주인되는 선택을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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