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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리트비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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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속으로] 리트비노프

입력
2001.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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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2월31일 소련의 외교관 막심 리트비노프가 75세로 작고했다.리트비노프는 소련 초기의 외교를 상징하는 사람이다.실업학교를 졸업한 뒤 22살에 혁명활동에 뛰어든 그는 1901년 차르의 비밀경찰에 체포됐으나 곧 탈출해 이듬해 영국으로 망명했고,러시아 볼셰비키를 대표해 제2인터내셔널의 여러 회의에 참가하는 등 유럽 전역에서 활약했다.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영국 정부는 그 이듬해 리트비노프를 공산주의 선전활동에 종사했다는 이유로 체포했지만,소련에서 체포된 영국 간첩 로카트와 교환돼 귀국했다.

소련으로 돌아온 리트비노프는 1921년 외무인민위원 서리에 임명된 뒤 1939년 독소불가침 조약 직전 외무인민위원 자리를 돌로토프에게 물려줄 때까지 소련외교의 총사령탑으로 일했다.그는 1922년 제네바회의 전권위원과 헤이그평화회의 수석전권위원을 맡았고,1927년에는 제네바군축회의 준비위원회 수석대표가 돼 세계의 군비 전폐를 제안했다. 1930년 리트비노프가 '서리'라는 꼬리표를 떼고 외무인민위원이 된 이후의 소련 외교는 흔히 '리트비노프 외교'로 불린다.리트비노프 외교의 특징은 친서방정책이었다.리트비노프는 1933년 워싱턴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담판해 미국으로 하여금 소련을 승인하도록 이끌었고,1934년에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을 성사시켰으며,1935에는 독일의 재군비선언에 맞서 프랑스-소련 상호원조 조약을 체결했다.

1939년 소련 외교 정책의 급전환에 따라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을 앞두고 외무인민위원 자리에서 해임됐지만,리트비노프는 1941년 미국주재 소련대사로 임명됐고,1943년에는 다시 외무인민위원 서리로서 자신의 후임자인 몰로토프를 도왔다.리트비노프는 1946년에 은퇴했다.

고종석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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