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2000년 6월 15일) 이후 숨가쁘게 달려온 남북관계가 2001년 ‘속도조절’이 무색할 정도로 소강상태에 빠졌다.남북은 특히 11월 6차 장관급회담 결렬 이후에는 힘겹게 이어온 대화의 끈 마저 놓아 버렸다.
관계가 꼬인 1차적 원인은 북미 적대관계 해소의 실패이다.
이봉조(李鳳朝) 통일부 정책실장은 “남북은 나름대로 화해국면을 유지하려 했으나, 북미관계 등 국제 환경의 영향으로 가시적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정리했다.
북한도 “반(反)공화국 고립압살 책동으로 이어진 한 해”라고 올 해를 정의했다.
2월 집권한 조지 W 부시 미 행정부는 잇달아 북한 지도부에 대해 강한 불신감을 표출하며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했고, 대미 관계개선을 ‘사활적’ 목표로 설정한 북한은 거세게 반발했다.
북미관계 악화는 3월13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던 5차 장관급회담의 무기연기와 이후 6개월 간의 대화단절로 표출됐다.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은 남한과의 대화 보다는 러시아, 중국과의 ‘북방 3각 관계’ 복원과 유럽연합(EU)과의 정상외교 등에 주력했다.
하반기에는 테러정국이 한반도를 압도했다. 미국의 대테러 전쟁은 북한의 위기의식을 더욱 고조시켜 9월 5차 장관급회담으로 숨통을 튼 남북관계를 다시 흔들었다.
북한은 남측의 테러경계조치를 이유로 이미 합의한 이산가족 행사 등을 일방적으로 연기, 찬물을 끼얹었다.
남북은 실랑이 끝에 금강산에서 6차 회담을 열었으나 향후 일정조차 잡지 못한 채 헤어졌다. 남북은 내적으로도 시련의 한 해 보냈다.
북한은 금강산관광사업이 위기에 빠지고, 전력지원이 사실상 물 건너가자 내부의 강경파의 목소리가 득세했고, 남한에서는 ‘퍼주기 논쟁’이 벌어졌다.
한국관광공사의 금강산사업 참여로 비등한 남남갈등은 8ㆍ15 평양 행사에서 일부 남측 인사들의 무분별한 행동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그 파장은 국회의 임동원(林東源) 통일부 장관 해임결의안 통과로 이어져 햇볕정책에 타격을 주는 요인이 됐다.
안팎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북한을 다녀온 남한주민이 8,000여명을 넘어섰고, 남북 교역액이 3억2,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도 1억2,000만 달러나 됐다. 이 같은 남북교류는 막힌 당국간 채널을 보완하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홍순영(洪淳瑛) 통일부 장관은 “남북은 교류를 통해 국제적 긴장을 슬기롭게 차단해왔다”면서 “한반도에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평화정착과정(peace process)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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