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무부의 호의로 4주 동안 미국 여러 곳을 듬성듬성 둘러보았다.9ㆍ11테러 이후의 미국을 관찰할 기회를 얻은 셈이다. 자주 옮겨 다녔기 때문에, 공항에 머문 시간이 적잖았다.
공항 풍경만 보면 미국은 경찰 국가 같았다. 무장 군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탑승객들은 엄한 몸수색을 받았고, 짐은 항공사 직원들의 손이나 엑스레이 머신을 통해 샅샅이 헤쳐졌다.
미국은 안전한가? 그런 것 같다. 짜증스러운 절차를 되풀이 거치고 비행기에 오르면 실제로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겼다.
그러나 이 안도감에는 다소 찜찜한 데가 있었다. 그것이 훼손된 자유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그 안전의 수호자들은 무장 군인들과 (더러는 인종주의적으로 보였던) 안전요원들, 항공사 직원들이다.
일부 승객들은 탑승하기 직전에 다시 한번 몸수색과 수하물 뒤짐을 당했다. 이 승객들은 컴퓨터가 임의로 선정(select)했다는데, 안전 요원들은 이들을 특별 손님(specialguest)이라고 불렀다.
보안(security)을 위한 이런 추가 검색의 대상자들은 그래서 흔히 S로 지칭되고 있었다. 기자의 선입견 탓인지는모르겠으나, S의 대다수는 아랍인이나 흑인을 포함한 유색인인 듯했다.
미국 국내 여행객의 압도적 다수가 백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묘한 일이다.
그러나 이 S를 컴퓨터가 뽑았다는 항공사 직원의 말을 믿지 않을 이유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기자는 컴퓨터가 유색인을 특별히 편애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 속사정이 어떻든, 지금 미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부시 대통령인 것 같다.
통치자에게 가장 바람직한 상황은 피치자들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공동의 적에 대한 적개심으로 뭉친 국민 앞에서 통치자는 편안하다.
그 하나가된 국민의 맨 윗자리가 통치자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국민의 일부는 흔히 적과의 잠재적 내통자로 간주된다.
9ㆍ11 이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간주돼 비밀리에 체포 감금된 1천수백명의 이슬람계 미국인들이나 아랍인들처럼 말이다.
공적(公敵)을 설정해 피치자들의 단합을 꾀하는 것은 탐욕스러운 통치자들의 장기였다.
히틀러는 집권하기 이전부터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인과 유대계 독일인들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공포를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국민의 무기력한 총화단결을 도모했다.
말할 나위 없이, 9ㆍ11 이후의 미국을 히틀러의 독일이나 1970년대의 한국에 비유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미국에서는 분명히 가증스러운 테러가 있었고, 그 테러에 대한 미국인들의 정당한 분노가 있었다. 그래서 강화된 보안조처에도 정당성이 있다. 그러나 공적의 설정을 통해 주류 국민의 단합을 꾀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지금 상황이 불길한 것도 사실이다.
무고한 이슬람계 시민들의 체포 감금은 특히 불길하다. 그것은 제2차세계 대전때의 일본계 시민들의 감금과 비교해도 그렇다.
지금 미국이 중앙아시아에서 수행하고 있는 것은 전쟁이라기보다 소탕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프라이버시를 포함한 시민적 자유의 일부를 헌납하고서야 안전을 얻을 수있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 안전은 타인(특히 외국인)에 대한 불신을 통해 확보되고 있다. 여기서 기자는 자유와 안전이라는 두 가치사이의 고전적 갈등을 목격한다.
극도로 위생처리된 사회는 분명히 안전한 사회일 것이다. 그러나 그 살균된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숨이 가쁠 것이다.
자유의 공기에는 늘 병균이 묻어 있는 법이다. 미국인들 다수는 이런 위생처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시민적 자유의 모국에서 그런 풍경을 보는 것은 우울했다. 자유의 헌납과 타인의 불신에 대범해질 수 있다면, 세상에 북한 사회만큼 안전한 곳이 있겠는가?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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