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가 리메이크된다면 그 영화에는 분명 독특한 강점이 있을 것이다.리메이크영화는 바로 그 원작의 장점을 수용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지만 역설적으로 리메이크 판에서는 그런 장점의 신선함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율배반적이다.
‘바닐라 스카이’는 알레한드로 나메나바르 감독의 ‘오픈 유어 아이즈’의 리메이크 판이다. 1997년 발표한 이 영화는 가상현실을 바탕으로 ‘매트릭스’와는 또 다른 단조 톤의 영상으로 호평을 받았다.
감독의 전작 ‘떼시스’에서 보였던 환상적 영상이 돋보이지는 않아도 ‘오픈 유어 아이즈’는 분명 ‘토탈 리콜’, ‘매트릭스’와는 다른 가상현실에 대한 해석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일단 ‘바닐라 스카이(Vanilla Sky)’는 도박으로 치면 상당한 종자돈을 갖고 뛰어든 영화이다. ‘오픈 유어 아이즈’의 탄탄한 시나리오, 톰 크루즈 주연(게다가 니콜 키드먼의 자리를 대신한 페넬로페 크루즈도 함께)에 카메론 디아즈와의 정사신까지.
‘바닐라 스카이’는 분명 출발이 좋다.
스토리는 물론 원작 그대로이다. 데이빗 에임스는 타고난 외모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출판사까지 연일 베스트 셀러를 내고 있는 한마디로 많은 것을 갖고 있는 남자.
그의 삶은 완벽하지만 ‘7난장이’로 불리는 이사회가 자신의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사실 혹은 망상에 괴롭고, 큰 업적을 남긴 위대한 아버지의 초라한 아들로서의 자의식도 늘 자신을 괴롭힌다.
친구이자 작가인 브라이언(제이슨 리)가 그의 생일에 동행한 소피아(페넬로페 크루즈)를 보는 순간, 데이빗은 그녀에게 깊이 빠져든다.
그러나 줄리는 데이빗이 자신을 ‘섹스파트너’라고 여겼다는 데 격분, 동반자살을 감행하고 데이빗은 겨우 살아 남지만 그의 모습은 프랑켄슈타인과 같은 누더기 몸일 뿐이다.
영화는 소피아의 살인범으로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는 가면 쓴 데이빗의 진술을 따라 전개된다. 수술을 통해 예전의 얼굴로 돌아간 데이빗은 그러나 줄리의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소피아를 줄리로 착각, 목졸라 죽이게 된다.
그러나 흉측한 몰골에서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장면부터 데이빗의 꿈. 실연의 아픔에 괴로웠던 데이빗은 약을 먹고 냉동인간이 되는 길을 택했고, 그 ‘지루한’ 냉동인간의 시기를 보내기 위해 ‘백일몽’ 옵션 프로그램을 택했던 것이다.
원작에서 ‘소피아’ 역을 맡았던 페넬로페 크루즈는 스페인식 영어 발음이 거슬리는 이국 여성으로 그려지고 있어 실망감을 주지만 ‘망가진’ 톰 크루즈의 모습은 새롭다.
그가 얼마나 자신감 있는 배우인가를 증명하려는 듯 그는 사고 이전의 모습보다 사고 이후의 흉한 캐릭터에 더욱 신경을 쓴 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나 더 크고, 더 화려한 세트와 배경에 눌려 일회성 섹스에 갇혀 버린 현대인의 내면과 기억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 등 다양한 모색의 기회는 봉쇄됐다.
푸른 듯 하면서도 뽀얗고, 붉은 듯 하면서도 창백했던 인상파 화가 모네의 ‘바닐라 스카이’의 하늘빛과 같은 영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감독은 ‘제리 맥과이어’로 톰 크루즈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카메론 크로우. 21일 개봉.
‘오픈 유어 아이즈’를 리메이크한 ‘바닐라 스카이’는 톰 크루즈의 매력에 기댄 영화다.
박은주기자
jupe@hk.co.kr
■카메론 크로우 감독
“하늘을 보면서 사람들은 기쁨이나 만족감을 갖게 되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던 데이비드가 돈으로 산 미래의 허구를 깨닫게 되는 매개체가 하늘입니다. ‘바닐라 스카이’의 어감도 좋고요. 또 영화 속 모네의 작품은 어머니에 대한 데이비드의 그리움도 내포합니다.”
‘바닐라 스카이’의 감독 카메론 크로우(44ㆍ사진)는 원작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을 담고 있음을 강조했다.
크로우는 “원작의 구성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도 “아메나바르의 ‘오픈 유어 아이즈’는 열린 구조로 물음을 던지는 데서 끝나지만, 우리는 그에 대한 답을 하고 싶었다. 인물의 성격을 부각시켰고, 보다 현실적이다”고 말했다.
“캐릭터가 살아있는 영화”를 좋아하는 크로우는 ‘바닐라 스카이’를 통해 변모를 꾀했다.
“비로소 말하는 사람에게만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상으로 무언가를말할 수 있게 됐다”는 것.
인물과 결말에 대한 다양한 단서도 작품 곳곳에 숨겨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노력이 눈에 띄지 않는 점을 아쉬워해야할 듯 하다.
‘제리 맥과이어’에 이어 톰 크루즈와는 두번째 작업.
“톰은 글을 존중할 줄 아는, 보기 드문 배우”라고 평가했다. 지난 해 만든 ‘올모스트 훼이모스’는 15세부터 ‘롤링스톤’ 등에 칼럼을 기고했던 크로우의 반자서전적 영화.
여성 록그룹 ‘하트’의 낸시 윌슨이 그의 부인이다. 이 같은 이력을 영화로 담아낼 계획도 있다. “60년대 소울 음악가인 마빈 게이의 일생을 그린 영화를 언젠가는 만들고 싶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