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이 넘치는 대학로에 웬 아줌마 군단? 어색할 법한 둘의 조합이지만 잠실운동장 못지 않은 환호와 열기가 있다.집안 살림에, 아이들 뒤치다꺼리에 공연 관람 같은 문화생활은 저만치 제쳐두었던 아줌마들이 모처럼 대학로에 외출했다.
세대를 같이하는 가수들과 추억을 공유하며 흐뭇한 시간을 보냈다.
CBS 프로그램 ‘유영재의 가요속으로’ 공개방송은 삶의 무게에 눌려 있었던 중년의 문화욕구가 뜨겁고 충만하게 발산되는 현장이다.
▼대학로,그곳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14일 오후 2시, 서울 동숭동 라이브극장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 있다. 열광적인 10대도, 팔팔한 20대도 아니다. 거의 대부분 30대 이상의 ‘아줌마’들이다.
2시 30분 CBS FM ‘유영재의 가요속으로’(월~토 오후4시) 공개방송이 시작되었다. 380여 석이 빈틈없이 찼고,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서지켜 본다.
포크그룹 ‘자전거 탄 풍경’이 아이돌(우상) 스타 god의 노래를 어쿠스틱 기타로 리메이크한 ‘어머님께’를 부르자 흐뭇한 미소가 번진다.
자신들을 위한 ‘아줌마버전’에 대한 만족감의 표시다. 앵콜이 이어졌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사회자인 유영재 아나운서가 다음 가수를 등장시킨다.
아줌마 관객은 따뜻하다. 가수 박정운이 “히트는 못 친 곡인데요, ‘영원’이란 노래를 부를게요. 사실 제 곡이 대부분 히트 못했지만…”이라고 말하자 여기저기서 나오는 소리.
“아녜요. 멋져요.” “절대 안 그래요.” 위로의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이어 왁스의 등장. ‘화장을 고치고’를 부른다.
최신곡이지만그 세대의 감성에도 꼭 맞아서인지 반응이 가히 열광적이다. 수줍게나마 “언니! 언니!”를 외치는가 하면 “어휴, 노래 잘하네. 체격도 조그마한데…”하는 소곤거림도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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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 음악시장
박강성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에는 여기저기서 한숨과 감탄이 이어진다.
“아무 생각이 없어지네, 왜 슬픈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메어지지.” 박강성이 강인원과 듀엣으로 부르는 복음 성가에 앞 자리에 앉은 한 여성은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특별 순서도 있다. 관객의 무대다. 부천에 산다는 정성자씨가 올라왔다. 내숭인지 진짜인지 “언니들, 저 고백하는데요, 노래 진짜 못해요”하며 몸을 뺀다.
그리고는 김수철의 ‘못다 핀 꽃 한송이’를 제법 매끈하게 뽑는다. 마치 동네 반상회 같은 친근하고 흉허물없는 분위기. 유영재 아나운서의 표현대로 ‘대머리에 머리 심듯’ 한 몇몇 ‘아저씨’들도 아줌마의 용기에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언니, 너무 날씬해요!”라는 찬사(?)를 받으며 등장한 노사연. ‘만남’을 부를 때는 관객의 합창에 가수 목소리가 묻힐 정도로 호응이 대단했다.
마지막인 노사연의 차례가 끝나자 이미 5시 30분. 쏟아지는 앵콜 요청을 감당하지 못해 “한 곡 더”를 연발하다 보니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늦어졌다.
밖으로 나온 아줌마들의 얼굴은 발그레했다. 젊음을 함께했던 가수들과의 만남, 자신들의 감성에 맞는 노래를 들으며 되새긴 벅찬 감흥 때문이었으리라.
서울 가양동에 산다는 김정순(50)씨는 “콘서트같은 데는 가 볼 엄두도 못 내다가 문화센터에서 우연히 공개방송 소식을 듣고 왔는데 참 좋다. 우리들끼리 있으니 젊은애들 눈치 볼 필요 없이 맘놓고 소리도 지를 수 있고 편하다. 스트레스가 확 날아간다”고 말했다.
출연한 가수들도 “다른 방송에서는 젊은 가수들 틈새에서 이방인처럼 떨떠름할 때가 많았다. 여기서는 관객들과 정서적으로 맞아서인지 노래가 편하게 잘나온다”고 만족해 한다.
박강성은 “어떻게 지내냐,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제법 속깊은 얘기들을 두런두런 나누기도 한다. 공연의 큰 재미다. 풍파를 겪고 인생을 아는 중년관객들하고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공개방송이 '아줌마 콘서트'가 된 사연
‘유영재의 가요 속으로’는 음악 프로그램으로는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아줌마 방송’을 표방하고 있다.
전업주부들이 슬슬 저녁 준비를 시작할 시간(4~6시)에 이선희, 이문세 등 아줌마들의 추억을 공략할 수 있는 노래를 주로 틀어주며 사연 신청을 받는다.
이 프로그램은 9월 20일부터 ‘생음악 전성시대’라는 타이틀로 안치환, 인순이, 한동준, 신효범 등 30대 이상의 여성들이 좋아할 만한 가수들을 5~6명씩 참여시켜 일곱 차례의 공개방송을 했다.
이날 자리에 앉은 관객은 모두 8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사람들이다. 350명정원에 무려 3,000여 건의 신청이 쏟아져 추첨을 통해 선발된 것이다.
공연 초반에는 700여 건에 불과했던 참여 신청이 석 달 사이에 무려여섯 배 가까이 늘어나 어느새 ‘아줌마 전용 콘서트’가 되었다.
무료 공개방송임을 감안하더라도 이는 주최측이 예상 못한 뜨거운 호응이 아닐 수 없다.
김우호 PD는 “문화생활에서 늘 뒷전으로 밀리던 아줌마들이 또래의 관객, 또래의 가수들과 함께 삶을 위로받고 추억을 나누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양은경기자
key@hk.co.kr
■아줌마 음악시장
이날 공연에 온 직장인 박정애(30)씨의 말. “많을 때는 한 달에 열 번 콘서트를 가기도 한다.”
박씨가 찾는 공연은 그룹 자전거 탄 풍경, 유익종, 박강성, 조인트콘서트 ‘회귀’ 등이다.
“댄스가수 립싱크만 아니면 다 좋다”고 할 정도로 범위가 넓다. 일부 10대들처럼 ‘누구 아니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배타성은 찾아볼수 없다.
박씨의 경우는 ‘아줌마 시장’의 잠재성과 폭발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실제로 이들 가수들의 공연은 얼어붙은 시장에서도 매번 좌석 점유율 70%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9월에 열린 80년대 말~90년대 초반 최고 인기 가수 조정현 박정운 박준하 김민우의 조인트콘서트 ‘회귀’는 3,500여 석의 좌석이 매진되었고 11월 앵콜콘서트마저 표를 구하기 힘들 정도였다.
10대에 점령당한 TV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그때 그 가수’에 대한 아줌마들의 열광 때문이다. 공연 기획자 안태경씨는 “양희은이나 정태춘ㆍ박은옥 콘서트의 경우 평균 좌석 점유율이 120%. 서 있는 관객도 상당수였다”고 말한다.
음반시장에서도 ‘아줌마’들은 조용하지만 무서운 힘을 과시한다. 유익종의 3년 전 음반 ‘그리운 얼굴’ 은 지금도 한 달에 1,000여 장이 팔려나간다.
두 달 안에 판매량의 대부분이 소화되는 10대 댄스시장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음반 관계자들은 “아줌마 고객은 의리가 있어 한번 팬이면 영원한 팬”이라고 말한다.
이미 성인음반은 폭발적인 시장성을 보여 주었다.
애잔한 멜로디, 가슴을 울리는 가사에 추억을 자극하는 감성이 결합되면 조관우, 김종환처럼 단일 음반으로 판매량 200만 장을 넘기는 ‘블록버스터’도 나올 수 있다.
‘아줌마들이 트로트나 좋아하겠지’하는 생각은 그야말로 편견이다. 조관우나 김종환의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미국처럼 ‘어덜트 컨템포러리(Adult Contemporary)’시장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유영재 아나운서는 “공개방송에 초대할 가수층이 그다지 넓지 않다”고 말한다.
방송에도 나오는 옛 가수들은 몇몇 발라드나 포크 가수가 전부일 뿐, 대부분 댄스 바람에 미사리 라이브클럽 같은 ‘업소’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작진은 라나에로스포나 전원석 등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가수들을 찾는 데 힘을 쏟고 있다.
공연기획자들은 “아줌마 소프트웨어를 개발해서 포장과 마케팅을 잘 하면 그만한 시장이 없다”고 말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아줌마 공연’은 상당히 효율적이다. 요란한 조명이나 무대장치 없이 그 세대의 감동과 추억을 나눌 수 있는 공연이면 열광을 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아줌마 관객은 열려 있다. 뛰어난 가창력과 감성적 호소력을 지닌 가수들, 그러면서도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가수들은 모두 어디에 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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